오늘의 저편 <2>
오늘의 저편 <2>
  • 이해선
  • 승인 2012.03.29 15: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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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용진은 어머니가 뼈저리도록 아픈 외로움의 종착역이 되어 줄 것이라고잔뜩 기대하지 않았다. 믿음은 있었다. 마음 붙일 곳이 없어서 찾아가는 아들을 내치지는 않을 것이라고 하는.

 언제나 그랬듯 용진의 어머니는 아들을 깊이 품어주지도 않으면서 다가가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암벽의 발치 옆으로 드러누운 큼직한 항아리만한 둥글번번한 바위가 있었다. 용진은 그 위로 올라서며 아래로 눈길을 그었다. 뒷산 자락에 안겨 있을 학동마을은 숲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어머니는 학동 쪽을 보며 뼛가루를 뿌려달라고 했다. 육이오 때 인민군에게 목숨을 잃었다는 아버지의 무덤은 남산에 있었다. 아버지 곁으로 가지 않고 화장해 달라고 했던 것도 무조건 불만이었다.

 용진은 상자뚜껑을 열려다 말고 그 자리에 잠시 앉았다. 양복 속주머니에 손을 넣어 가로로 말린 두툼한 편지 종이뭉치를 꺼냈다. 교통사고를 당한 어머니가 운명하기 직전 화장해 달라는 말과 함께 그의 손에 쥐여 준 것이었다. 종이뭉치의 양쪽 끝은 닳고 닳아 있었다.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고 하면서 용진은 종이뭉치의 내용이 불쑥불쑥 궁금하기는 헸다. ‘나한테 보내려는 거였어?’ 겉봉에 자신의 집 주소가 적혀 있는 것을 본 그는 제바람에 긴장했다. 우표까지 넉넉하게 붙여져 있었다. 오래전부터 용의주도한 어떤 일의 표적이 되어 있었다는 예감에 사로잡혔다.

 유민의 초청으로 용진은 일주일 후면 이 땅을 떠나기로 되어 있었다. 어머니한테는 알리지 않고 있었다. 끝까지 자식을 밀어내기만 하는 사람한테는 말하고 싶지 않아서 임종을 지킬 때도 절대로 말을 꺼내지 않았다.

 편지지에 쓰인 깨알 같은 글씨가 용진의 눈길을 끌기 시작했다.

 “뭐? 아버지께서!”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하는 평범한 말머리에 이어 아버지의 생존을 언급해 놓은 것을 보면서 용진은 비명부터 질렀다. 이제까지 아버지는 육이오 때 인민군에게 죽임을 당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어머니와 5년 전에 세상을 뜬 고모가 그렇게 이야기했다.

 ‘나환자 이럴 순 없어!’     

 두 눈으로 글씨를 훑어가고 있던 용진은 진저리를 쳤다.

 ‘무서운 사람들! 독한 사람들!’

 용진은 고모와 어머니의 모습을 동시에 떠올리며 전신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1945년 6월, 패망을 앞둔 일제는 마지막 발악을 하고 있었다. 그 증세가 지독하고 악질적이어서 부모한테 고이 받은 우리 성씨를 왜식으로 바꾸라고 협박하고 씨알맹이도 없는 자기네들 사당에 절할 것을 강요하기도 했다. 소년티를 벗지도 않은 학생들을 학도병으로, 처녀들을 종군위안부로 끌고 가는 등등.

 일본순사들은 특히 문둥병 환자들을 보면 무조건 잡아갔다. 잡혀간 그들을 어디로 가는지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없었다. 구덩이 속에 몰아넣고 산채로 태워 죽인다고 하는 믿지 못할 소문만 돌았다. 포장하지 않은 짐짝이 되어 소록도로 실려 간다는 이야기도 무성하게 떠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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