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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저편 <3>
이해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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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2.03.29  15: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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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에서 경성방향으로 가면서 지지대 고개가 있었다. 고개 왼쪽에는 뒷산과 남산이 어깨와 이마를 비비며 마을사람들을 감싸 안고 있었다. 여남은 집이 모여 있는 학동마을은 뒷산자락에 얌전하게 안겨 있었다.

 학동에선 목을 많이 돌리지 않아도 산들이 다투어 눈에 걸려들었다. 앞쪽으론 들판이 있었고 그 사이로 흐르는 시냇물이 젖줄을 내놓고 있었다. 학동 어귀엔 이백 살이 넘었다고 하는 정자나무가 들어오고 나가는 이들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다.

 “미, 민숙아, 왜놈 온다!”

 화성댁은 사립문 안으로 들어서며 딸의 방을 향하여 숨 가쁘게 외쳤다. 고추밭에 잡초를 뽑으러 나갔다가 순사가 마을 쪽으로 오는 것을 보곤 화들짝 놀라 지름길로 달려온 것이었다. 딸과 동갑내기인 아랫마을의 순영이는 두 달 전에 왜놈들의 트럭에 실려 간 후 지금까지 어디로 갔는지 소식조차 모르고 있었다.

 딸의 방에선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벌써 뒷문으로 달아났을까?’ 화성댁은 목을 갸우뚱하며 댓돌로 걸음을 와락 당겨갔다. ‘혹 낮잠이라도 든 것일까?’ 아무리 몸을 숨기기 급해도 민숙은,

 “아, 알았어요.”

라고 하는 대답 정도는 해 주었다.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힌 화성댁은 방문을 왈칵 열어젖혔다. 그리고 속된 말로 눈알이 툭 불거져 나올 만큼 놀랐다.

 밥값 해야 할 나이의 딸 민숙을 신주단지 모시듯 방안에 남겨두고 화성댁이 혼자 밭에 나갔던 것은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나선 딸을 내놓으라고 강요하곤 하는 순사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이년이 데인 어미 가슴에 소금으로 마구 문질러도 유분수지.’ 화성댁은 짚이는 곳이 있다는 얼굴로 사립문 밖으로 달음질치기 시작했다.

 진석의 집은 뒷산 자락에 제일 깊이 안겨 있었다. 진석은 열여섯 살인 민숙보다 두 살 위였고 경성에서 전문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방학도 아닌데 뭣 땜에 학생이 집에 와 있을까?’ 화성댁은 진석과 민숙의 사이가 오누이처럼 친하다는 건 뻔히 알고 있었다. 

 ‘이것들이 정말 눈이 맞은 걸까?’ 화성댁은 부지중에 머리를 짧게 가로저었다. 일찍 돌림병으로 남편을 잃은 그녀에겐 가까운 친척도 없고 자식이라고 해 봐야 민숙이가 전부였다.

 민숙을 출산하고도 미역국은 커녕 목구멍에 풀칠할 것이 없어서 화성댁은 풋보리 끓인 멀건 물을 마셔야 했다. 어미가 제대로 먹지 못했으니 갓 태어난 딸에게 먹일 젖이 잘 나올 턱이 없었다. 물기 없는 젖꼭지를 물고 늘어지며 칭얼대는 핏덩이를 들쳐 업고 화성댁은 칡뿌릴 캐기 위해 서산과 동산까지 뒤지고 다녔다. 소나무 속껍질을 벗겨 꾹꾹 씹으며 주린 배를 달랜 적도 많았다.

 어쨌든 화성댁은 바라보기에도 애틋한 딸자식이 하나 있어서 모진 목숨을 꾸역꾸역 이어왔다.  

 화성댁의 눈에 진석이만 바로 딱 세워놓고 살펴보면 사윗감으로 나무랄 데가 없어 보였다. 읍내의 보통학교를 다니다 만 민숙이에 비하면 학벌도 좋고 졸업한 후 교직에 몸담게 될 것이어서 그만하면 장래성도 좋았다. 일없이 다른 것까지 저울질해 보지 않아도 진석은 민숙에게 과분한 상대였다.

 그러나 화성댁은 또 목을 가로저었다. 진석의 아버지 김씨는 오래 전 말 그대로 하룻밤 사이에 사망했다. 지랄개떡 같은 시절 탓인지 멀쩡하던 사람이 갑자기 죽을 수도 있고 쥐도 새도 모르게 누군가에 잡혀가기도 했다. 그런데도 김씨의 죽음에 대하여선 말들이 많았다.

 ‘정말로 급살? 혹시 자살? 행방불명? 도망자?’ 사람들은 둘만 모이면 김씨의 일에 대하여 온갖 의혹을 이야깃거리로 삼았다.

 그 무렵부터 진석의 어머니인 여주댁이 문밖출입을 잘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동네사람들과도 얼굴을 거의 마주하지 않고 있어서 이웃사람들의 의혹은 잘 가라앉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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