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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저편 <4>
이해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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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2.03.29  15: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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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에 수십 번씩 화성댁은 민숙을 빨리 시집보내야겠다고 벼르며 입술을 깨물곤 했다. 위안부로 끌려가는 길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매파한테 말을 넣어둔 지도 꽤 오래되었다. 이쪽 형편도 내놓을 것이 없는 터여서 입에 살살 녹는 그런 떡을 물색해 달라고 부탁하진 않았다. 정신 제대로 박혀 있고 사대육신 멀쩡한 총각이면 되었다.

 ‘그냥 진석에게 시집보내 버릴까’ 화성댁은 머릿속이 끈적끈적해 옴을 느꼈다. 버릇처럼 머리를 짧게 흔들었다.

 진석의 누이는 시집 간지 삼년 만에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쫓겨났다. 지금 경성에서 기생집을 하고 있었다. 하고많은 일 중에서 하필이면 술파는 일을 하는지 그것이 화성댁은 영 못마땅한 것이었다.

 ‘두고 봐. 무슨 일이 있어도 민숙이 누날 내 각시로 만들고 말 테니까.’ 화성댁은 불현듯 형식의 말을 떠올렸다. 형식은 어릴 때부터 민숙이 뒤만 그림자처럼 졸졸 따라다녔다.

 진석이한테 마음이 죄다 주어버린 탓인지 민숙은 형식이가 영 사내로 보이지 않는 눈치였다.

 형식은 올봄에 돈을 벌어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경성으로 떠났다. 그곳 마포에서 왜인이 운영하는 미국상회에서 점원으로 일한다고 했다. 일흔이 넘은 할머니를 홀로 남겨두고 간 터에 몇 달째 한 번도 오지 않는 것을 보면 독한 구석도 없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가진 것이 너무 없어서 탈이지 집안 내력은 걸릴 것이 없었다. 화성댁은 형식이가 마을에 있었을 때 딸을 설득하여 짝을 지어주지 못한 것을 뒤늦게 후회하고 있었다.

“민숙아, 또 웬일이냐?”

 민숙에게 대문을 열어주며 진석의 어머니 여주댁은 목소리를 억제하며 눈을 홉떴다. 다 큰 처녀애가 햇빛 아래 얼굴을 내놓고 나다닐 때가 아니었다. 그런 데다 학도병으로 끌려가지 않으려고 진석이가 집에 와 있었다. 무슨 냄새를 맡았는지 어제는 살쾡이 같은 순사가 들이닥쳐선 간장 항아리 된장독 뚜껑까지 열어젖히지 않았던가. 민숙의 꼬리에 일본순사의 그림자라도 따라붙었을까 봐 여주댁은 가슴이 바싹 졸아붙었다.

 “오빠한테 책을 빌려갔거든요.”

 민숙은 습관처럼 얼굴을 살짝 붉히곤 시집 한 권을 여주댁 앞에 내밀듯 말 듯 했다.       

 “그래? 내가 전해 줄 터이니 이리 다오.”

 거의 매일 이 핑계 저 핑계를 만들어서 오곤 하는 민숙의 속내를 여주댁은 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번번이 빨리 돌려보내지 못해 애를 태워야 했다. 아들도 민숙에게 단단히 빠져 있는 눈치였다.

 민숙을 며느릿감으로 눈여겨보면 여주댁의 마음에 꽉 차는 것은 아니었다. 그나마 학동은 물론 인근 동네로 눈을 두루 돌려 봐도 보통학교 문턱이라도 넘어 본 처녀는 민숙이 뿐이었다. 더욱이 남편 일을 떠올리면 무조건 주눅부터 들고는 해서 둘이 사귀는 것을 반대할 수 없었다.

 “저 오빠한테 물어볼 것이 있어서요.”

 민숙은 방안에 꼼짝 말고 틀어박혀 있으라는 어머니의 우격다짐을 무시하고 여기까지 왔다. 진석의 옆모습이라도 보지 않고는 발길을 돌릴 수가 없었다.

 “음, 음??.”

 말문이 막히고 만 여주댁은 새삼 민숙을 당돌한 아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요즘처럼 지랄 같은 세상을 살아가려면 당돌한 기질도 있어야 하고 당찬 구석도 있어야 한다고 스스로를 구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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