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진석에게 시집보내 버릴까’ 화성댁은 머릿속이 끈적끈적해 옴을 느꼈다. 버릇처럼 머리를 짧게 흔들었다.
진석의 누이는 시집 간지 삼년 만에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쫓겨났다. 지금 경성에서 기생집을 하고 있었다. 하고많은 일 중에서 하필이면 술파는 일을 하는지 그것이 화성댁은 영 못마땅한 것이었다.
‘두고 봐. 무슨 일이 있어도 민숙이 누날 내 각시로 만들고 말 테니까.’ 화성댁은 불현듯 형식의 말을 떠올렸다. 형식은 어릴 때부터 민숙이 뒤만 그림자처럼 졸졸 따라다녔다.
진석이한테 마음이 죄다 주어버린 탓인지 민숙은 형식이가 영 사내로 보이지 않는 눈치였다.
형식은 올봄에 돈을 벌어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경성으로 떠났다. 그곳 마포에서 왜인이 운영하는 미국상회에서 점원으로 일한다고 했다. 일흔이 넘은 할머니를 홀로 남겨두고 간 터에 몇 달째 한 번도 오지 않는 것을 보면 독한 구석도 없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가진 것이 너무 없어서 탈이지 집안 내력은 걸릴 것이 없었다. 화성댁은 형식이가 마을에 있었을 때 딸을 설득하여 짝을 지어주지 못한 것을 뒤늦게 후회하고 있었다.
“민숙아, 또 웬일이냐?”
민숙에게 대문을 열어주며 진석의 어머니 여주댁은 목소리를 억제하며 눈을 홉떴다. 다 큰 처녀애가 햇빛 아래 얼굴을 내놓고 나다닐 때가 아니었다. 그런 데다 학도병으로 끌려가지 않으려고 진석이가 집에 와 있었다. 무슨 냄새를 맡았는지 어제는 살쾡이 같은 순사가 들이닥쳐선 간장 항아리 된장독 뚜껑까지 열어젖히지 않았던가. 민숙의 꼬리에 일본순사의 그림자라도 따라붙었을까 봐 여주댁은 가슴이 바싹 졸아붙었다.
민숙은 습관처럼 얼굴을 살짝 붉히곤 시집 한 권을 여주댁 앞에 내밀듯 말 듯 했다.
“그래? 내가 전해 줄 터이니 이리 다오.”
거의 매일 이 핑계 저 핑계를 만들어서 오곤 하는 민숙의 속내를 여주댁은 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번번이 빨리 돌려보내지 못해 애를 태워야 했다. 아들도 민숙에게 단단히 빠져 있는 눈치였다.
민숙을 며느릿감으로 눈여겨보면 여주댁의 마음에 꽉 차는 것은 아니었다. 그나마 학동은 물론 인근 동네로 눈을 두루 돌려 봐도 보통학교 문턱이라도 넘어 본 처녀는 민숙이 뿐이었다. 더욱이 남편 일을 떠올리면 무조건 주눅부터 들고는 해서 둘이 사귀는 것을 반대할 수 없었다.
“저 오빠한테 물어볼 것이 있어서요.”
민숙은 방안에 꼼짝 말고 틀어박혀 있으라는 어머니의 우격다짐을 무시하고 여기까지 왔다. 진석의 옆모습이라도 보지 않고는 발길을 돌릴 수가 없었다.
“음, 음??.”
말문이 막히고 만 여주댁은 새삼 민숙을 당돌한 아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요즘처럼 지랄 같은 세상을 살아가려면 당돌한 기질도 있어야 하고 당찬 구석도 있어야 한다고 스스로를 구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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