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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저편 <13>
이해선  |  gnnews@g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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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2.03.29  15:2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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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동마을은 깊은 물속에 가라앉아 있는 것처럼 고요했다.

 첫새벽에 남산으로 오른 진석은 아버지의 빈 무덤을 파고 있었다. 이번에는 정말 그를 묻기 위해. 

 바로 그 옆에 광목에 둘둘 말린 김씨의 시신이 있었다. 등불을 든 여주댁은 남편 곁을 지키고 있었다. 관은 살 엄두도 내지 못했다. 날만 밝으면 동료를 찾으러 순사가 눈을 시뻘겋게 뜨고 달려올 것이었다.

 그 동안 진석은 가슴으로 아버지의 초상화를 수도 없이 그려댔다. 기억에 없는 그 모습을 핏줄의 본능적인 그리움으로 녹여 무작정 멋지게만 묘사했다. 빙그레 웃는 초상화를 그려놓았을 땐 입가에 웃음을 쿡 찍기도 했다.

 아직 빛을 잃지 않은 별들의 밝은 시선이 땅으로 쏟아져 내렸다. 등불에 비친 진석의 얼굴엔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물기가 질펀했다. 굿 속에서 떠낸 흙을 밖으로 던지는 그의 눈에선 붉은빛이 일렁거렸다.

 ‘왜?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진석은 또 입언저리를 크게 떨었다.

 ‘소록도로 갔어야지.’

 진석은 느닷없이 삽을 팽개쳤다.

 김씨의 존재가 드러난 어제 오후부터 여주댁은 애써 아들의 시선을 피했다. 남편을 잃은 애석한 마음을 내색할 수도 없었다. 아들의 눈치를 보며 혼잣말로 중얼거리기는 했다. 소록도로 보내어진 나환자들은 손끝이 다 문드러진 손으로 강제노역을 당한다고. 너무 먼 그곳으로 보낼 수 없어서 뒷산 굴속에서 지내게 했다고 덧붙이며.

 ‘빨리 장례를 끝내야 한다.’

 아들을 지켜보는 여주댁은 애가 바짝바짝 탔다.

 ‘영원히 숨어있지 않고 왜? 왜?’

 일그러진 얼굴로 진석은 귀를 막았다. 아버지로 호칭하고 싶지 않은 그의 목소리가 속귀에서 울리고 있어서였다. 그가 혐오스런 얼굴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던 절박한 그 상황까지 되살아나는 바람에 당장 돌아버릴 것만 같았다.   

 진석은 벌떡 일어나 삽을 집어 들었다. 죽음의 유혹에 사로잡히듯 삽의 목을 움켜쥐곤 삽날로 자신의 가슴을 겨냥했다.

 “안 된다. 진석아!”

 여주댁이 달려와 삽을 붙잡고 늘어졌다. 들고 있던 등불이 금방이라도 꺼져 버릴 듯 위태롭게 흔들렸다.

 “이 가슴을 파내 버릴 겁니다.”

 진석은 아버지라는 사람에게 단지 빚진 기분으로 살고 싶지 않을 뿐이라고 덧붙이며 사나운 표정을 지었다. 목숨을 구해 준 문둥병 환자가 생판 모르는 남이었다면 뼈저리게 감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아버지가 멋진 모습으로 나타났다면 꿈속이었더라도 기분 좋게 맞이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난, 난, 문둥병자의 아들이다!’

진석은 온몸에서 벌레들이 스멀거리는 것만 같아서 견딜 수가 없었다.

 “천륜인데 가슴을 파낸다고 없어지겠니?”

 여주댁은 아들의 마음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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