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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저편 <18>
이해선  |  gnnews@g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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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2.03.29  15:2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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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별들도 또렷또렷한 눈으로 민숙을 보았다.

 “이년 민숙앗!”

 화성댁이 입에 거품을 물고 나타났다. 다짜고짜 딸의 머리채를 낚아채곤 마을로 끌어가기 시작했다. 오다가 몇 번이나 넘어졌는지 누런 광목 치마에는 시뻘건 흙이 군데군데 찍혀 있었다.     

 “엄마, 이것 놓고 말씀하세요.” 

 민숙은 목소릴 낮추어 침착하게 말했다.

 “이 철딱서니 없는 년아, 문둥병이 얼마나 무서운 지 알기는 알고 덤비니?”

 화성댁은 이를 뽀드득 갈았다.

 “알았어요. 제 발로 갈게요. 이거 놔 주세요.”

 민숙은 앞장서서 끌려가 주었다. 어머니의 드센 행동이 오빠의 아픈 가슴을 더욱 깊이 후벼 파 놓을 수 있어서 마음저리는 것이었다.

 그악스런 장면을 지켜보며 여주댁은 입을 꾹 봉하고 있었다. 드러내놓을 수 없는 가슴만 갈가리 찢기고 있었다. 화성댁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아들의 가슴에 대못이 되어 쿡쿡 박히고 있을 것이어서.

 ‘한 많은 이 세상, 훌훌 털고 좋은 곳으로 가시오. 숨어살지 않아도 될 곳으로 마음껏 날아가시오. 당신을 위해 슬퍼하지 않을 테니 웃으며 가시오.’

 여주댁은 눈물을 왈칵왈칵 쏟으면서 울지 않겠다고 주문을 외어댔다.

 검기만 하던 동쪽하늘에 파르스름한 먼동이 조금씩 비치기 시작했다.   

 진석은 아침노을이 동산 머리맡을 붉히기 전에 학동마을을 떠났다.

 ‘독사보다 더 독해져야 한다.’

 여주댁은 딱 한번 뒤돌아보는 아들을 향하여 빨리 가라고 손사래를 치며 아픔을 악물고 있었다.

 순사 다께가 새로 학동마을에 나타나곤 했다. 놈의 눈은 어쩌다 슬쩍 마주쳐도 온몸에 소름이 쫙 돋을 정도로 눈알이 노랬다. 그런 눈을 사납게 굴려대며 기분 내키는 대로 사람들을 끌고 갔다.

 학동 사람들은 무조건 모른다고 딱 잡아뗐다.    

 어디까지나 왜놈순사 앞에서는 겁도 없이 그랬다.

 사실 학동마을에선 시도 때도 없이 앞집과 뒷집 그리고 옆집과 옆집의 담 위로 여자들의 머리가 쏙쏙 올라오곤 했다. 그녀들은 얼굴을 바짝 맞대고는 여주댁을 씹고 또 씹으며 치를 떨었다.

 문둥병 환자가 아이를 잡아먹는다는 속설이 있었다.

 까닭으로 아이가 있는 집에선 비상사이렌까지 울려놓았다. 남의 어린것들에게까지  단단히 주의를 주곤 했다. 산에 붙어 있는 그 집 근처엔 절대로 가지 말라고.

 사실 학동사람들은 여주댁을 마을에서 쫓아내고 싶은 마음들은 굴뚝같았지만 서로의 눈치를 보며 먼저 말을 끄집어내진 못하고 있었다.

 사정이 그렇더라도 여우같은 왜놈순사한테만은 여주댁과 진석을 내어줄 수 없는 노릇이었다. ‘같은 토종끼리’라고 하는 핏줄의식이 묵묵히 사람들 마음을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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