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저편 <20>
오늘의 저편 <20>
  • 이해선
  • 승인 2012.03.29 15: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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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산 등성을 타고 넘어온 해거름이 짙은 그늘로 돌변하여 학동을 뒤덮고 있었다. 

 이제 여주댁은 축 늘어져 있었다.

 그녀를 구슬리다 지쳐 협박하고 마구 발길질하며 구타하던 다께는 혀를 내둘렀다. 이런 독한 년은 처음 본다 싶었다.

 급기야 다께는 학동사람들을 모아놓고 일주일 후에 여주댁을 공개처형할 것이라고 엄포를 놓았다. 대일본제국타령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해대며 왜경을 죽인 놈의 어미를 살려둘 수 없다는 것이었다.

 오랜만에 시골에 다녀온 형식은 진석의 누이인 동숙을 찾아갔다.

 “어머 얘, 네가 웬일이니?”

 기생집 뒤로 샛문을 사이에 둔 살림집에서 낮 시간을 보내고 있던 그녀는 형식을 보는 순간 반색했다.

 “누님, 요즘 집 소식은 듣고 있으세요?”

 형식은 무슨 말부터 어떻게 꺼내야 할지 막막하고 난처했다.

 ‘누님도 모르고 있었죠? 아버지께서 살아계셨다는 사실을요.’

 김 씨 생각만 해도 형식은 말문이 딱 막히는 기분이었다. 

 “기생집을 한다고 사람 취급도 안 해 주는데 무슨 수로 고향집 소식을 듣겠니?”

 당장이라도 동숙은 ‘왜 무슨 일이 있니? 울 어머니는 잘 지내시디? 또 진석은 어떻데?’ 이렇게 막 물어보고 싶었다.

 동숙은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곤 성냥을 그었다. 긴긴 한숨을 담배연기에 실어 푸푸 내뿜고는 했다. 그녀 얼굴에 드리워진 짙은 고독의 그림자가 허연 연기 사이로 들락거렸다.

 여주댁이 딸에게 기생집을 한다고 노골적으로 싫은 내색을 하진 않았다. 잘하는 짓이라고 손뼉을 치며 칭찬한 적도 결코 없었지만. 

 동숙은 자신의 처지가 왠지 가족들에게 떳떳하지 않았던 것이다. 시집에서 쫓겨난 것만으로도 큰 불효를 저지르고 있는 셈이었다. 어머니와 동생의 안부가 궁금해지면 미움 없는 원망으로 그리움을 달래며 참아왔다.   

 “바쁘시더라도 빨리 한 번 다녀오세요.”

 형식은 동숙에게 까닭모를 동정심을 느꼈다.

 “잘들 지내시지?”

 동숙은 어머니와 동생의 사정을 콕콕 집어서 묻고 싶은 것을 꾹 참으며 눈으로 허공을 더듬었다.

 “아, 아뇨. 그게 있잖아요?”

 긴장한 형식은 제바람에 말을 더듬었다.  

 “왜 그러니? 우리 집에 무슨 일 있니?”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히는 얼굴로 동숙은 담뱃불을 껐다. 잔뜩 굳어 있는 형식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아주머니께서 주재소에 끌려가셨어요.”

공개처형 건까지 말해야 하는데 형식은 마음만 급했다. 

 “뭐라고? 왜? 뭣 땜에?”

 동숙은 죄 없는 형식에게 소리를 꽥 질렀다.

 “어쨌든 빨리 고향집에 가 보세요.”

 그렇게 말하고 나서야 형식은 좀 더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누난 아주머닐 면회하기 위해 만사 제쳐놓고 고향으로 달려가겠지? 그러면 모든 것을 알게 될 거야.’

 형식은 스스로를 달래듯 속으로 중얼거렸다.

 “흥, 우리 어머니가 무슨 죄를 지었겠니? 진석일 학도병으로 끌고 가지 위한 연막이겠지?”

 동숙은 어머니를 믿고 있었다. 혀를 깨물고 죽는 한이 있어도 진석이 있는 곳을 말하지 않을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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