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저편 <23>
오늘의 저편 <23>
  • 이해선
  • 승인 2012.03.29 15:2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년아, 바른대로 말해. 진석이 놈하고 아무 일도 없었던 거지? 그렇지? 그렇다고 말해. 이년아. 그렇지?”

 아득히 깊은 늪 속으로 빨려 들어감을 느끼며 화성댁은 절망했다.

 “일은 무슨 일이요?”

 “이년아, 귀신을 속여라.”

 “아침 먹은 것이 체했다니까요?”

 “어서 바른대로 말 못해?”

 “몰라요, 몰라. 전 이제 어떡하면 좋아요? 엉엉엉…….”

 비로소 작전이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느낀 민숙은 속으론 쾌재를 부르며 더욱 큰소리로 울어댔다.

 “네년이 모르면 누가 알아?”

 뼈마디가 저려 옴을 느낀 화성댁은 상체를 좌우로 한번 비틀었다. 이어 딸한테 와락 들려들었다. 한 가닥으로 얌전하게 땋아 내린 딸의 머리채를 움켜쥐곤 같이 죽자고 하며 마구 흔들어댔다.

 “잘못했어요, 어머니. 실컷 화풀이를 하세요.”

 민숙의 몸뚱이는 자루 속에 갇힌 꼴로 이리저리 흔들렸다.

 이젠 모진 목숨 구차하게 이어갈 이유가 없어졌다고 넋두리로 게거품을 끓이던 화성댁은 어느 순간 벌렁 드러누웠다. 천정을 보며 실성한 사람처럼 허허거리다 말고 벌떡 일어났다. 앙상한 자기 가슴을 툭툭 치고도 모자라 머리를 집어 뜯었다. 허벅지를 피멍이 들도록 꼬집기도 했다.

 민숙은 속으로 울고 가슴으로 용서를 빌며 어머니를 지켜보고만 있었다. 마음을 차갑게 떨어뜨리고 생각해낸 방법이었다. 후회는 없었다.

 “네 이놈을 당장 요절을 내야지.”

 어느 순간 화성댁은 팔을 둥둥 걷어붙이며 사립문 밖으로 달렸다.

 “어머니, 저 같은 딸 용서하지 마세요.”

 민숙은 어머니의 등에다 대고 되뇌었다. 굳이 어머닐 부르며 뒤따라 나가지는 않았다.

진석의 집 대문은 바보처럼 입을 헤 벌리고 있었다. 씩씩대며 단걸음에 그곳까지 간 화성댁의 얼굴에 심한 허탈감이 맥 빠진 그늘로 끼얹혔다. 그녀는 터덜거리는 다리로 마당 안까지 들어가기는 갔다.

 주인 잃은 빈집이 쓸쓸히 화성댁을 맞이했다.

 진석의 방 앞까지 간 화성댁은 복잡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한숨만 푹푹 쉬어댔다.   뒷산자락을 쓰다듬으며 넘어온 바람에 흔들린 대문이 삐걱 소리를 냈다.  

 화성댁은 뒷산으로 터벅터벅 발걸음을 떼어놓고 있었다. 빗물에 씻겨 내려간 오르막길엔 돌부리가 앙상하게 불거져 있었다. 그녀는 짚신으로 간신히 가린 발끝으로 돌부리를 툭툭 차며 잘도 올라갔다.

 뒷산 중턱에 봉분마저 초라한 무덤이 하나 있었다. 그 앞에 앉은 화성댁은 저고리 옷고름으로 눈시울을 꾹꾹 누르고 있었다. 짚신 밖으로 드러나는 발끝에선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여보, 민숙 아버지, 우리 민숙이 저 년 어떡하면 좋아요? 문둥이 애새낄 뱉으니 이 일을 어떡하면 좋으냐고요?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없는 저 년을 앞으로 어떡해야 하냐고요? 뭐라고 말 좀 해 보세요.’

 남편의 무덤 앞에 무너져 내려 버린 화성댁은 가슴에 뭉친 것들을 풀어내며 오열했다. 울다 말고 그녀는 불현듯 영감에 사로잡히는 얼굴로 돌변했다.

 ‘입은 삐뚤어져도 말은 바로 해야지 진석이가 왜 문둥이야? 그 아비가 문둥이라고 그 아들까지 그러라는 법은 절대로 없다니까. 암, 그렇고말고. 진석인 멀쩡해. 그만하면 인물도 얼마나 좋은가 말이다.’

 억지웃음까지 지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경상남도 진주시 남강로 1065 경남일보사
  • 대표전화 : 055-751-1000
  • 팩스 : 055-757-1722
  • 법인명 : (주)경남일보
  • 제호 :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 등록번호 : 경남 가 00004
  • 등록일 : 1989-11-17
  • 발행일 : 1989-11-17
  • 발행인 : 고영진
  • 편집인 : 강동현
  • 고충처리인 : 최창민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지원
  • 인터넷신문등록번호 : 경남, 아02576
  • 등록일자 : 2022년 12월13일
  • 발행·편집 : 고영진
  •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gnnews@gnnews.co.kr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