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저편 <39>
오늘의 저편 <39>
  • 이해선
  • 승인 2012.03.29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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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무르익고 있는데 벌써부터 가을 맞은편에 있는 새봄을 기다리면 계절이 욕할까? 그래도 화성댁은 봄이 무척 그리웠다. 일본이 망하는 건 시간문제라고 하는소문이 공공연하게 떠돌고 있었다.

 ‘이년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아침이라고 한술 뜨기 위해 보리밥을 바가지에 좀 뜨고 간장 종지를 곁들여 마루 끝에 걸터앉던 화성댁은 허공에다 민숙의 얼굴을 그렸다.

 ‘어미 생각은 눈곱만큼도 안하는 년!’

 경성으로 간 이후 통 소식이 없는 딸을 생각하면 그녀는 이가 바드득 갈릴 정도로 괘씸했다. 

 ‘입덧하느라 잘 처먹지도 못할 텐데…….’

 보리밥을 한 숟갈 입에 떠 넣다 말고 허공을 씹었다. 목이 메는지 밥 대신 눈물을 삼켰다.

 “거 누구요?”

 숭늉을 가지러 부엌으로 가던 그녀는 흠칫 놀라며 그 자리에 우뚝 섰다. 놀란 눈은 담장에 고정되어 있었다.

 ‘헛것을 봤나? 틀림없이 뭔가 쑥 올라왔는데?’

 어깨를 좀 움츠리며 목을 갸우뚱했다.

 담장 위로 민숙의 집을 엿보려던 진석은 난처한 얼굴로 엉거주춤 허리를 좀 굽히고 있었다. 얼굴을 드러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고 있어서였다. 달아나 버리고 싶은 충동이 뇌리를 스치기는 했다.

 그는 어젯밤 늦은 시각에 학동으로 숨어들었다. 엉겁결에 자신의 몸부터 숨기고 보았지만 집 걱정을 떨어버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좀 더 솔직하게 표현하면 어머니가 당할 고통이 너무 빤히 보이고 있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철도 들지 않은 주제에 어설프게 효자흉내를 내는 건 아니었다. 여전히 가슴 한 구석에선 어머니에 대한 혐오감이 스멀거리고 있었다.

 ‘어떻게 지내는지 그것만 알자.’

 진석은 자신에게 이렇게 말해 두었다.

그는 처음부터 어머니 앞에 얼굴을 드러낼 생각 같은 건 없었다. 담을 뛰어넘을 땐 숨소리도 내지 않았다. 집이 텅 비어 있는 것을 확인하면서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불길한 생각을 떨어버리듯 머리를 이리저리 흔들어댔다.

 진석은 어머니의 행방부터 알아야 했다. 학동 사람 그 누구에게도 마음 놓고 다가갈 수가 없었다. 그들에게 다가가기도 전에 문둥병자의 아들이라고 침을 뱉으며 손가락질을 해댈 것만 같았던 것이다.

 결국 진석은 민숙에게로 갈 수밖에 없었던 거였다.

 ‘민숙이는 늦잠에 빠진 것일까.’

 화성댁이 부엌으로 들어가는 기미가 느껴진 그는 허리를 좀 펴며 목을 또 살그머니 들었다.

 “엉! 자, 자네……?”

 막 부엌에서 나오던 화성댁은 담장 위로 나타나는 진석의 얼굴을 보곤 어지간히도 놀라며 들고 있던 숭늉그릇을 떨어뜨렸다.

 ‘아, 어쩌지?’

 아버지의 장례식이 있던 그날 민숙을 무지막지하게 끌고 가던 화성댁의 모습을 떠올리며 진석은 당황했다.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며 꽁무니를 빼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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