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걸음에 사립문밖으로 달려 나온 화성댁은 급한 김에 목청부터 뽑았다.
“아. 예.”
광목 찢는 소리가 등에 척 달라붙는 순간 진석은 등이 후끈 달아오름을 느꼈다.
‘이상하다.’
그대로 우뚝 서며 진석은 동공에 힘을 주었다. ‘여보게’라고 했던 화성댁의 그 말을 되씹었다. 그녀에게 발각되는 순간 온갖 저주를 다 퍼부으며 민숙이 근처엔 얼씬도 하지 말라고 할 줄 알았다.
“들어오게. 그냥 가면 어떡하나?”
김 씨 일로 기가 죽어 있는 것 같아서일까. 화성댁은 진석이가 썩 곱거나 보기 싫을 정도로 밉지는 않았지만 왠지 안 되어 보이는 것이었다. 어느 구석에 이런 변덕스런 기질이 잠복하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딸을 본 듯 반가움이 앞서는 것도 어쩔 수가 없었다.
“불쑥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진석은 마지못해 몸을 돌렸다.
“아닐세. 어서 들어오게.”
화성댁은 사립문 안으로 먼저 들어갔다.
‘숨어 다녀야 하는 판국에 처갓집인들 훤한 대낮에 찾아들 수 있었겠는가?’
아무튼 딸의 소식을 가지고 왔을 그가 기특하기까지 한 것이었다.
“아닙니다. 바빠서 이만…….”
진석은 어색한 얼굴로 사립문까지 따라가는 체하다간 넌지시 몸을 돌렸다. 또 상대가 하게체로 이야기하고 있어서인지 불안한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침을 꿀꺽 삼켰다.
‘도대체 무슨 속셈일까? 혹시 날 여기 잡아두기로 순사하고 밀약이라도 맺은 건 아닐까? 달아나야 해. 민숙이는 왜 이렇게 안 일어나는 거야?’
심호흡까지 곁들였다.
미우나 고우나 이제 그는 백년손이 아닌가. 씨암탉을 잡아 바치진 못하더라도 맨입에 보낼 수는 없었다.
“저, 아주머니 며칠 내로 한 번 더 찾아뵙겠습니다.”
부엌으로 종종걸음을 치는 화성댁 뒤를 딱 한 발짝만 따라갔다.
‘민숙아, 제발 좀 일어나 봐.’
그녀의 방문을 흘기곤 몸을 재빨리 돌려 말 그대로 내빼기 시작했다.
“여, 여보게!”
화성댁은 기겁을 하며 진석의 뒤를 따라갔다.
‘순사라도 나타난 것일까?’
하얗게 질리는 얼굴로 두리번거렸다. 직감적인 느낌이었지만 순사 냄새 같은 건 나지 않았다.
‘사윈지 백년손님인지한테 냉수 한 사발 못 먹여 보내더라도 내 새끼 소식은 들어야 해.’
달아나는 그를 향하여 급한 김에 민숙이 년은 잘 있느냐고 물었다.
“에엣?”
진석은 달리다 말고 목을 뒤로 홱 돌렸다.
‘지금 민숙인 어디 있는 거야? 설마?’
진석은 머리가 엄청 복잡해지는 마음으로 화성댁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경성 누이 집엔 아직 못 가 본 건가?”
화성댁은 단도직입적으로 그렇게 물었다. 머리가 빨리도 그렇게 돌아간 것이었다. 숨어 다니다 학동에 먼저 온 것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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