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저편 <53>
오늘의 저편 <53>
  • 이해선
  • 승인 2012.03.29 15: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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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극이야 상극.”

 대뜸 그렇게 말했다. 그리곤 민숙을 위해 살풀이굿을 꼭 해야 한다고 다시 덧붙여 말했다.

 “둘이 연분은 있나요?”

 무녀와 더는 얼굴을 마주대하고 싶지 않았던 화성댁은 급기야 궁금증을 훅 털고 말았다.

 “상극이라니까. 물과 불이야. 이 둘은 절대로 안 돼. 여자가 팔자를 이리 세게 타고나서야 어찌 결혼 생각을 하겠누? 쯧쯧…….”

 이젠 무녀도 더는 화성댁에게 해줄 말이 없다는 듯 몸을 저쪽으로 돌렸다.

 “이녁 팔자나 챙겨요.”

 화성댁은 코웃음을 치며 몸을 일으켰다.

 ‘세 번씩이나 갈아 친 서방을 차례로 다 잡아먹은 주제에 멀쩡한 남의 팔자 걱정하고 자빠졌네.’

 속으로 점쟁이의 팔자를 실컷 비웃었다.

 너무 일찍 혼자된 그녀는 남자를 잘 낚기로 소문이 나 있었고 걸려든 남자마다 일 년을 넘기지 못하고 저쪽세상으로 가 버리곤 했던 거였다.

 태양이 하늘복판에서 햇살을 튀겨대고 있는지 세상의 그림자란 그림자는 죄다 숨어버렸다.

 시냇가의 조약돌은 하얀 알몸을 다 드러내 놓고도 더위를 잘도 견뎌내고 있었다.

 “이제 가봐.”

 급기야 민숙은 싸늘한 얼굴로 벌떡 일어났다. 이제는 정말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며 어리광을 부리는 형식이의 등을 잔인하게 돌려놓아야 할 때라고 판단한 것이었다.

 “갈게. 가야지. 가야겠지.”

 형식이도 마지못해 몸을 일으켰다. 쨍쨍 내리쬐는 햇빛을 받고 있는 그 얼굴이 칠흑처럼 어두웠다.

 일순간 침묵이 흘렀다. 개미 기어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조용했다. 그리고 사방은 너무 밝았다.

 난데없는 사이렌 소리가 적막을 깨뜨렸다.

 “웬 사이렌 소리니?”

 민숙이가 먼저 놀란 눈을 홉뜨며 진저리를 쳤다.

 “무슨 일일까?”

 형식이는 잽싸게 사립문 밖으로 달렸다.

 “각시한데 가라.”

 무심결에 형식이의 뒤를 따라가며 민숙은 외쳤다.

 “또 난리가 났나 봐.”

 동문서답을 하며 형식은 민숙이를 지켜주어야겠다는 얼굴로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

 “난리야 매일 일어나고 있잖니?”

 뜻 모를 섬뜩함을 느끼고 있던 민숙은 겉으론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대꾸했다.

 “며칠 전 미군이 일본의 히로시마와 사가사키에 아주 무서운 폭탄을 떨어뜨렸잖아? 무지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나봐. 눈이 뒤집혀진 왜놈 새끼들이 어떻게 가만있나 했더니 기어이 우리한테 보복하려는 건가 봐.”

 형식은 할머니부터 들은 간토 지진 사건까지 재빨리 덧붙이며 민숙의 손을 가까운 산언덕으로 이끌었다.

 “어머, 정말이니? 무서워!” 

민숙은 무심결에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녀도 왜인들은 하늘이 내린 벌까지 우리나라 사람에게 그 죄를 뒤집어씌워 보복한다는 이야길 많이 주워들었다. 

 학동어귀에 있는 정자나무가 둘의 눈에 빤히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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