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저편 <58>
오늘의 저편 <58>
  • 이해선
  • 승인 2012.03.29 15: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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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늦은 시각에 경성에 도착한 형식은 주위를 살피며 가게로 다가간 후 소리를 죽이며 문을 열었다.

 “사, 살려주세요.”

 인기척을 느낀 종업원 철주는 문을 향하여 모깃소리만한 목소릴 냈다.

 “철주야!”

 형식은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목을 돌렸다. 불을 함부로 밝힐 수는 없었지만 철주가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다는 것과 쌀과 보리쌀들이 다 털렸다는 건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예. 저? 여?기…….”

 “그래, 철주야. 그런데 영식이는 어디 있니?”

 철주를 일으켜 안으며 보이지 않는 영식이를 찾아 형식은 눈을 사방으로 굴려댔다.

 ‘집밖으로 끌려 나갔다면 큰일이다.’

 형식은 학동에서 보았던 장면을 떠올리며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왜인이 팽개치고 간 가게를 왜 맡아서 하느냐고 따진다면 할 말이 없었다. 왜인 밑에서 점원노릇 한 것까지 들추어 앞잡이 취급을 한다면 더욱 더 변명할 말이 없었다. 그렇더라도 철주와 영식이는 정말 아무 죄도 없었다. 

 누군가가 지나가는 한 사람을 가리키며 ‘저 놈 왜놈 앞잡이다.’ 라고 소리치면 무조건 와르르 달려들어 몰매를 가하는 판국이었다.    

 “배, 배…….”

 말을 제대로 마무리하지도 못하고 철주는 맥없이 목을 늘어뜨렸다.

 “안 돼, 철주야. 정신 차려! 정신 차리란 말야.”

 놀란 형식은 당황히 철주를 방안으로 부축하여 들어갔다. 신음소리조차 내지 않는 그의 머리와 팔 다리에선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서둘러 지혈부터 한 형식은 약을 구하기 위해 밖으로 뛰쳐나오다 다시 들어갔다.

 “죽으면 안 돼.”

 형식은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나오게 하여 철주의 입에 갖다 댔다. 이렇게 하면 죽어가는 사람이 깨어나더라고 하는 이야길 들은 것이었다.

 그의 뺨을 찰싹찰싹 치며 시골에 계시는 홀어머니는 생각하라고 목청껏 소리를 질렀다. 축 늘어져 있는 그의 어깨를 마구 흔들어 보기도 했다.

 ‘철주야 기다려.’

 급기야 형식은 가까운 한약방을 떠올리며 문을 박차고 나갔다. 그곳의 김 씨 아저씨는 침을 잘 놓기로 소문이 나 있었다. 근래에는 서양에서 들어온 페니실린도 갖다 놓았다고 했다. 평소에 할머니의 약을 지으러 가고는 해서 서로 정이 끈끈하게 들어 있었다.

 ‘널 꼭 살리고 말 거야.’

지금 형식은 모든 병을 단방에 낫게 한다고 하는 그 페니실린이라는 것에 최면이 딱 걸려 있었다. 배달용으로 쓰던 자전거마저 보이지 않아서 그냥 달렸다. 땀에 젖은 바짓가랑이가 다리에 척척 달라붙고 있었지만 달음질을 멈추지 않았다.

 순사가 다 달아나고 없어서일까. 통행금지 시간이 훨씬 지났는데도 사람들이 떼를 지어 몰려다니고 있었다. 형식은 사람들이 보이며 무조건 양팔을 번쩍 들어 올리며 너무 감동스런 목소리로 만세를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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