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말한 것은 오직 정감의 함양이라는 측면에서 말한 것이다. 그러나 고인이 시를 배울 때에는 또 하나의 목적이 있었으니 그것은 응용의 방면이다. 공자는 “시를 배우지 않으면 제대로 말도 하지 못한다”(‘논어’‘계씨’)고 말하였다. 또 “‘시경’300편을 다 외우고 있다 하더라도 정무를 맡겼을 때 일이 제대로 되지 않고 사방의 나라들에게 사신으로 보냈을 때 응대해낼 만한 역량이 없다면 아무리 외우는 시가 많았던들 무슨 소용이 있는가”(‘논어’자로)라고도 하였다.
‘좌전’양공 28년조에 “시를 읊조리매 어느 한 장에서 자기가 원하는 뜻을 발견한다”는 말이 있다. 어느 한 구절에서 자기 나름의 뜻과 감동을 느낀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시를 배워 응용하는 방법인 것이다. 그러기에,
뼈와 상아 다듬는 듯 / 구슬과 돌 갈고 가는 듯 ‘위풍.기오’을 읽고 자공은 사람의 가난과 부에 처하는 몸가짐을 깨닫고, 웃으면 보조개 / 예쁜 그 눈매 / 고운 색 위 흰 분이 아리땁고녀 ‘위풍. 석인’을 읽고 자하는 ‘예후(禮後)’(인격의 수양에서 마음이 바탕이고 예는 이를 완성시키는 몸가짐)의 본의를 터득하니 공자도 두 사람을 칭찬해서 “사(賜)(자공)와 상(商)(자하)은 참 함께 시에 관해서 이야기할 만하다”(‘논어’<팔일>)고 하였다.
뽕뿌리를 벗겨다가 / 창과 문을 엮었거니 / 사람들이 쳐다보며 / 얕보다니 이 무슨 말 ‘유풍. 치효’을 읽고 맹자는 “그 나라를 잘 다스리면 어느 나라가 감히 없신여기랴”라는 뜻을 생각하였고, 뽕나무엔 뻐꾸기/ 새끼는 일곱/ 어지신 우리 님의 거동은 하나 ‘조풍. 시구’에서 순자는 “그러므로 군자는 한마음으로 맺혀 있는 것이다” 라는 뜻을 읽었다.
이밖에도 ‘좌전’이 기록하고 있는 바와 같은 열국의 경대부들이 시를 읊조리어 자기의 뜻을 나타낸 것으로부터 ‘한시외전’과 ‘신서’에서 어떠한 사실을 기술하거나 또는 대의를 주장할 때에 ‘시경’의 시를 인용하여 증명을 삼으려고 하는 사례에 이르기까지 모두 ‘단장취의’의 범주에 속한다고 하겠다. 반드시 그 시의 소재가 되어 있는 사적이나 취지에는 상관없이 우리 자신이 느끼는 바가 작자의 그것에 통하면 이를 이끌어서 더욱 풍부하게 느끼고, 비슷한 감동에 부딪히면 더욱 발전시켜 느끼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에 이 또한 덕성을 단련하고 지혜를 더하는 하나의 방법인 것이며 고인이 항상 사용하였으며 금후에도 역시 본받아 사용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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