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저편 <62>
오늘의 저편 <62>
  • 이해선
  • 승인 2012.03.30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제 넌 그 집 귀신이다.”

 사립문 밖으로 목을 길게 빼곤 하던 시흥댁은 또 신방으로 들어와 딸에게 주입식 교육이라도 시키듯 ‘그 집 귀신타령’을 한바탕 읊었다. 딸이 시집에 가지 않겠다고 떼라고 쓸까 봐 그러는 것일까.

 정자는 말없이 목만 끄덕였다. 사실 이제 열여섯 살인 그녀는 어머니의 말뜻을 도무지 알 턱이 없었다. 신랑이 증발해 버린 이런 상황이 어이없고 기가 막혀 오만가지 생각들이 머리를 가득 메우고 있을 뿐이었다. 더욱이 앞날을 당겨오면 막막하기 짝이 없지만 시집에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까지는 머리를 굴리고 할 여유가 없었다. 어른들이 가라고 하면 그냥 가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정자 측 집안어른들은 머리를 맞대고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궁리했고 드디어 결정했다. 혼례식을 올렸으니 정자는 어쨌든 신랑 집에 떠넘기기로. 그에 앞서 작은아버지 되는 사람을 먼저 신랑 측에 보내 사실부터 알리자고 하는 것이었다.

 “그래, 그래, 많이들 짖어다오!”

 이른 아침 방에서 나오던 형식의 할머니는 마당가에 있는 감나무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앞을 다투어 깍깍거리는 까치들의 목소리가 오늘따라 더 반갑고 오늘따라 고맙기까지 한 것이었다.

 “새신랑이 복은 타고 난 사람인가 봐요. 혼례식 날 나라가 독립이 되었으니 경사가 겹쳐도 아주 크게 겹치지 않았습니까!”

 “이제 그 못된 왜놈도 쫓겨 가고 어르신께선 손자며느리도 보았으니 아무 걱정 이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시기만 하면 됩니다.”

 “이제 곧 증손을 보게 되었으니 얼마나 좋으세요?”

 “고생하신 보람이 있으니 참 좋으시죠?”

 잔칫상 준비에 일손을 보태기 위해 온 마을 아낙네들이 입을 모아 덕담들을 나누고 있었다.

 담벼락 위에 앉아 목을 갸웃거리고 있던 까치 한 마리가 때맞추어 자지러지게 짖어댔다. 지붕위의 까치들은 장단을 맞추었다.

 형식의 집에 도착한 정자 숙부는 새신랑의 할머니를 부축하는 체하며 재빨리 방으로 모시고 들어갔다.

 “뉘신지?”

 노파는 초면인 그를 불안한 눈초리로 살폈다.

 그리고 자초지종을 전해들은 노파는 머리를 빨리도 굴려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손자는 요즘 일이 많아서 가을에 혼인하겠다고 하더라고. 서둘러 혼인을 시킨 건 순전히 이 할미의 실수였다고. 모르긴 해도 쌀가게에 급한 일이 생겨서 경성에 달려간 것이 틀림없다고. 그리고 이 모든 일들은 양가를 위해 비밀에 부치자고. 

 노파는 덧붙였다. 곡식을 도둑맞곤 할 때마다 손자가 제일 힘들어 하더라고. 주인이 잠시만 자리를 비워도 일하는 것들이 쌀을 후무리고 할 땐 놈들을 패죽이고 싶지만 차마 그러지도 못하는 모양이라고.

 “그럼 첫날밤을 치룬 조카사위가 미곡상에 급한 볼일이 생겨 경성에 간 겁니다.”

 이윽고 숙부도 은밀한 목소리로 결론을 지었다.

 “암, 그렇다마다요. 신랑각시가 첫날밤을 잘 치렀는데 무슨 걱정을 하겠어요.”

 노파는 그녀자신에게 다짐하며 목을 끄덕였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경상남도 진주시 남강로 1065 경남일보사
  • 대표전화 : 055-751-1000
  • 팩스 : 055-757-1722
  • 법인명 : (주)경남일보
  • 제호 :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 등록번호 : 경남 가 00004
  • 등록일 : 1989-11-17
  • 발행일 : 1989-11-17
  • 발행인 : 고영진
  • 편집인 : 강동현
  • 고충처리인 : 최창민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지원
  • 인터넷신문등록번호 : 경남, 아02576
  • 등록일자 : 2022년 12월13일
  • 발행·편집 : 고영진
  •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gnnews@gnnews.co.kr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