껍데기
껍데기
  • 경남일보
  • 승인 2012.04.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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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기 (경상대학교 홍보실장)
두꺼운 책 여러 권보다 한 편의 영화가 사실을 더 잘 말해줄 수 있다. 베스트셀러는 종종 영화로 만들어진다. 노래 한 곡이 영화 한 편보다 더 감동적인 경우도 많다. ‘나는 가수다’의 청중 평가단이 눈물을 흘리는 이유다. 노래 한 곡보다 짧은 시 한 편이 가슴에 더 오래 남고 세상을 더 많이 바꿀 수도 있다. 윤동주의 ‘서시’나 신동엽의 ‘껍데기는 가라’는 그 증거라고 할 수 있다.

‘껍데기는 가라’는 1930년에 태어나 39년을 살고 1969년에 요절한 신동엽이 1967년에 쓴 시다. 37살의 나이에 이런 절창을 쓴 것을 보면 그는 천생 시인일 수밖에 없었던 듯하다. ‘四月도 알맹이만 남고’의 4월은 4ㆍ19를 가리키는 말이다. 혁명을 의거라 하고, 군사 쿠데타를 혁명이라 우기던 시기도 있었지만, 4월은 시민, 민주주의, 혁명이라는 말과 맥이 잇닿아 있는 개념이 되었다. 우리 현대사에서 4월은 의미가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되는 것 같다.

국회의원 선거 즉, 총선을 4월에 하게 된 것이 언제부터인지는 잘 모르겠다. 지방자치제 선거는 6월, 대통령 선거는 12월로 정해져 있는 것이 이제 당연한 듯 받아들여진다. 나는 세 가지 선거 가운데 총선을 가장 중요하고 재미난 선거라고 생각한다. 또 총선을 4월에 하는 것이 꼭 ‘껍데기는 가라’와 연관되어 있는 것처럼 느낀다. 푸근한 봄바람에 백화가 만개하는 좋은 시절, 국민들은 우리를 ‘대표’하여 또는 ‘대신’하여 나라살림을 해줄 사람을 뽑는다. 이들을 선량(選良)이라 한다. 잔치일 수밖에 없다. 잔치는 산과 들에서도 동시에 열린다.

흥겨운 잔치가 열리는 4월에도 사라져야 할 껍데기는 있다. 아름답고 향기로운 꽃이 4월의 알맹이라면, 서해를 건너오는 황사는 껍데기일 것이다. 겨레와 나라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는 정신이 알맹이라면, 당리당략과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는 말뿐인 공약은 껍데기라 할 것이다. 먼 미래의 큰 그림을 그릴 줄 아는 혜안이 알맹이라면, 눈앞의 작은 이익 챙기기에 바쁜 사람은 껍데기라고 불러줘야 한다.

시인 신동엽은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고 외쳤다. 아름답고 소중한 자연을 보전하는 마음은 흙가슴에 안기고, 불도저로 밀어붙이고 휘황찬란한 위락시설을 꾸미려는 마음은 쇠붙이에 달라붙어 있을까. 외진 골목에서 힘겨운 삶을 이어가는 이웃에게 따뜻한 눈길로 다가가는 마음이 흙가슴에서 피어나는 꽃이라면, 이웃돕기 성금 모금 텔레비전 화면에 잠시 얼굴 비치고 마는 마음은 쇠붙이에 붙은 녹이라 할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면 ‘아무리 가라고 외쳐도 가지 않는 모오든 껍데기와 쇠붙이는 누가 치워야 할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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