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저편 <68>
오늘의 저편 <68>
  • 경남일보
  • 승인 2012.04.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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앉은자리에서 스스로를 탓하며 화성댁은 너무 못마땅한 자신을 향하여 입을 삐죽거렸다. 인간의 탈을 쓰고 있기에 사람의 도리는 알고 있었고 그래서 가슴이 찔려오는 것도 막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황성댁은 지금 사람의 도리 같은 것을 따지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딸년의 명줄이 뚝 끊기고 나면 도리고 나발이고 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도리타령하며 딸년의 명줄을 순순히 저승사자한테 내주었다고 염라대왕한테 상 받을 일이라도 있겠던가 말이다.

화성댁은 남의 손자 신방을 눈으로 핥아댔다.

일부러 사립문을 밀었다 당겼다 했다.

돌멩이를 집어 신방 앞으로 던졌다. 만약에 노파가 먼저 잠을 깬다면 불벼락이 떨어질 것이었지만 두렵지 않았다.

때마침 소피가 마려워 방에서 나오던 형식은 화성댁을 발견하곤 고맙게도 맨발로 달려 나왔다.

“넷? 누나가 아프다고요?”

화성댁의 이야기를 다 듣기도 전에 형식은 무조건 민숙의 집으로 앞장섰다.

“이러면 안 되는데. 진석이 놈에게 연락만 넣어주면 되는데…….”

형식을 뒤따라가며 화성댁은 남몰래 웃음을 빼물었다.

“누가 왔냐?”

인기척을 느낀 형식의 할머니는 상체만 좀 들어선 문고리에 매달리듯 하며 방문을 열었다. 마당이 텅 비어 있는 것을 확인하곤 사립문 쪽으로도 눈길을 그었다.

‘늙은이가 일찍 일어나 설치면 애들이 불편해.’

노파는 신방 쪽으로 그었던 눈길을 거둬가며 소리 없이 방문을 닫았다. 새벽에 잠을 깬 새신랑이 새색시를 깊이 안아주었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싶었다.

“누나! 정신 차려. 왜 아픈 거야? 왜?”

형식은 민숙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오, 오빠?”

민숙은 간신히 입술을 들썩였다.

“누나! 이게 뭐야?”

형식은 진석에 대한 원망과 미움이 가슴바닥으로부터 회오리쳐 올라옴을 느끼며 입언저리를 사정없이 씰룩거렸다.

“왜 또 왔니?”

몽롱한 의식 속에서도 형식의 목소리가 속귀에 닿고 있음을 인식한 민숙은 절망을 느꼈다. 철없고 속없는 새신랑의 등판을 마구 두들기며 당장 각시한테 돌아가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조차 없었다.

“뭐, 왜 왔냐고?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내가 행복해지길 바라면서 누나가 행복해지길 바라는 내 마음은 왜 모르는 거야?”

화가 단단히 난 얼굴로 형식은 마구 떠들어댔다.

“경성엔 언제쯤 갈 것인가?”

마음이 급한 화성댁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말없이 밖으로 나온 형식은 곧장 경성으로 달렸다. 진석이만을 죽도록 그리워하는 누나가 또한 죽도록 미워서 그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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