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직한 교단 소설가 문신수(11)
강희근 교수의 경남문단, 그 뒤안길 (235)
정직한 교단 소설가 문신수(11)
문영철은 병고에 시달리던 아버지 문신수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 말했다. “돌아가시기 직전 서울 모 병원에 입원하셨을 때의 일입니다. 환자를 잠도 재우지 않고 식사도 못하게 하면서 이런 저런 검사를 받게 했습니다. 입원 둘째날 아침에 한 여자 의사가 마침 심문을 하듯이 계속 질문을 했습니다. 몸이 성한 저도 아버지와 같이 잠을 자지 못했기 때문에 무엇을 물어보는지 어리둥절해 하고 있는데 그 의사는 그것도 모르느냐는 듯이 아버지를 다그쳤습니다. 참다못한 제가 따지려고 했더니 아버지께서 한사코 만류했습니다. 그 의사가 나가고 난 다음 제게 하시는 말씀이 ‘사람은 때가 되면 다 알아보는 법이다. 서두르지 말아라.’ 그로부터 열흘 정도 지난 후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버지는 내일 세상이 끝난다고 해도 아마 몇 십년을 염두에 두고 그 사람을 기다리고 계셨을 것입니다.” 문신수는 상대가 자기를 불편하게 하는 말이라도 참고 이해하도록 기다리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문신수는 일상적인 공부는 화장실에서 하는 것이 여가선용으로 좋은 방법으로 알고 실천했다. 문신수의 집 재래식 화장실에는 지붕 서까래에서부터 내려온 긴 줄에 통 하나가 매달려 있었다. 그 통 속에 영어책이 들어 있었다. 문신수는 영어를 배워 본 적이 없었다. 그의 영어 공부는 그 화장실에서 이루어진 것이 전부였다. 7,8백 페이지 정도 되는 영어책을 작은 분량으로 여러 권 분리해서 한 권씩 보고 또 보았다. 맨 마지막 장에는 언제부터 언제까지 몇 회독을 했는지 기록해 나갔다. 문신수는 이런 공부를 ‘틈새공부’ 라 했다.
문신수는 늘 병고에 시달렸다. 그렇기 때문에 의학백과사전을 옆에 두고 몸과 병에 대한 연구를 많이 하게 되었다.몸무게는 평생 60키로를 넘은 적이 없었다.그중 문신수를 가장 오래 괴롭힌 병은 위궤양이었다. 문신수는 늘 ‘노루모산’을 지니고 다녔다. 1973년에는 그 위궤양이 천공이 되고 말았다. 위 천공성 복막염에 이른 것이다. 이 복막염은 24시간을 넘기지 못한다 하는데 밤중부터 앓기 시작하여 내내 뒹굴다가 다음날 오후 근 20시간이 지나서야 진주 병원으로 옮겨져 수술을 받았다. 그때의 체험이 ‘서석당 애석기’와 ‘울 재주 죽을 재주’ 등의 단편소설을 쓰는 계기가 되었다.
1991년도였다. 문영철이 한참 공무원 시험 공부를 하고 있을 때 집에 전화를 걸면 “아버지 어머니는 잘 지낸다. 아무 일 없으니 공부만 열심히 하라.”는 소리만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무래도 아버지 목소리가 이상해서 문영철은 바로 남해로 내려가겠다고 하자 어머니는 “그러게, 자네가 내려오는 게 좋겠네.”하는 것이었다. 고속터미널에서 다시 전화를 걸자 진주 경상대병원으로 바로 오라는 것이었다. 문영철이 경상대병원 응급실에 들어서니 문신수는 그동안 야윌 대로 야위어 갓난아기처럼 작은 몸이 바로 눕지도 못하고 새우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들어서는 아들을 보고는 문신수는 홑이불을 머리 위까지 덮어버리는 것이었다. 자식 눈을 들여다보면 눈물을 보일 것 같아 그런다는 것이었다. 문신수는 끊임없이 딸국질을 해대었다. 딸국질을 한 번 할 때마다 너무나 야윈 몸이라 온몸이 흔들렸다. 시골에서 진찰한 바로는 위암말기라는 것이었는데 위 내시경으로 진찰한 결과 급성 위염으로 밝혀졌다. 결과를 듣고 병실로 돌아온 형제들은 목놓아 울었다. 한참을 울다가 문신수보고 문영철이 “아버지는 왜 우셨습니까?”하자 “너희들이 울어서 같이 울었니라.”하더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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