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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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남일보
  • 승인 2012.04.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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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기 (경상대학교 홍보실장)
점심시간, 그는 밥도 먹지 않고 학교 옥상 난간에 기대어 멍하니 서 있었다. 눈은 젖어 있었다. 교실에서는 친구들 떠드는 소리가 창밖으로 퍼져나와 허공을 맴돌고 있었다. 난간을 잡은 그의 손이 조금 떨렸다. 손가락이 아렸다. 점심시간을 앞둔 4교시 영어시간에 그는 손바닥을 스무 대나 맞았다. 젊은 영어 선생님은 대뿌리로 만든 회초리를 힘껏 내리쳤다. 주먹이 쥐어지지 않을 정도로 손바닥은 부어올랐고 손가락은 푸르뎅뎅 멍이 들었다. 도시락을 꺼내던 그는 밥 먹기를 포기하고 친구들 눈을 피했다. 숟가락을 잡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바람이 불어왔다. 스무 대를 맞으면서 그는 한번도 피할 생각을 안했고, 선생님을 원망하지도 미워하지도 않았다. ‘어떡하면 영어를 잘할 수 있을까’ 그것만 생각했다.

영어 선생님은 시험을 볼 때마다 50점 만점에 ‘최소 25점 이상’ 몇 점을 얻을 것인지 목표를 적어내라 한 뒤 실제 점수가 목표에 못 미치게 되면 그 차이만큼 손바닥을 때렸다. 대부분 손바닥을 맞는다. 그래도 겨우 5점을 얻어 스무 대를 맞은 건 기록적이었다. 부끄러웠다. 아무도 없는 옥상에서 그는 초점 없는 눈으로 먼 곳을 보고 있었다. 친구 한 명이 그를 찾아왔다. 늘 앞뒤로 마주앉아 밥을 먹던 그의 얼굴이 안 보이니까 찾아온 것이다. 친구는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무 말 없이 어깨에 손을 얹어 “너는 그래도 국어는 잘 하잖아”라고 말했다. 위안이 되었다.

그는 고등학교 주요 과목 국ㆍ영ㆍ수 가운데 국어는 자신 있었다. “서로 열심히 해 보자”며 악수를 했으나 손에는 감각이 없었다. 마음을 추스르고 교실로 돌아갔지만 결국 점심은 굶었고, 퉁퉁 부어오르고 피멍이 든 손바닥을 어떻게 하면 부모님께 들키지 않을까 걱정하느라 오후 수업시간에도, 야간자율학습 시간에도 공부가 되지 않았다. 부끄러움도 그의 꼭뒤에 붙어 있었다.

며칠 뒤 그는 학교 앞 서점에서 쉬운 영어 참고서를 샀다. ‘명사’로부터 시작하여 ‘to부정사’, ‘동명사’로 이어지는 문법책은, 그러나 그에겐 여전히 난공불락이었다. 공부 잘하는 친구들에게 설명을 들어도, 수업시간에 정말 귀를 쫑긋 세워도 영어는 어쩔 수 없는 외계어일 뿐이었다. 학년이 끝나기 전에 영어 선생님은 갑자기 외국으로 공부하러 가셨고, 새 영어 선생님은 학생을 때릴 줄 모르는 분이어서 그의 영어공부는 다시 시들해졌다. 당연히 실력이 늘 수가 없었다. 그렇게 어찌어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갔다.

그는 지금도 영어와 사이가 좋지 않다. 그는 가끔 호랑이 같던 그 영어 선생님을 생각한다. ‘고등학교 때 그렇게 해서 단어 몇 개라도 외우지 않았던들 나는 지금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싶은 것이다. 그는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30년 전의 나다. 지금은, 부끄럽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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