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용범 (창원시의원)
막걸리는 그 기원이 정확하지 않다. 단군신화에도 햇곡으로 빚은 제주를 ‘신농주(伸農酒)’라 불렀으며, 조선 양조사에 보면 “대동강 일대에서 빚기 시작해서 국토의 구석구석까지 전파되어 민족의 고유주가 되었다”고 기록돼 있다. 막걸리는 토속적이다. 비지땀이 흐르는 한여름 들판의 뙤약볕 속이나 장마철 농막 아래에서 양은 주전자에 담긴 막걸리를 사기그릇에 철철 넘치도록 받아 벌컥벌컥 들이켜는 맛은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필자의 어린 시절 막걸리에 대한 기억을 해 보면 세무서에서 가끔 밀주조사를 나오면 온 동네가 발깍 뒤집어지고 몰래 담가 놓은 것을 잡히는 날에는 마치 그 집은 형무소로 끌려가는 것 같은 초상집 분위기였다. 그때 당시 지금의 필자와 같은 나이 또래라면 누구나 아버지의 술심부름에 대한 추억이 있을 것이다. 노란 양은 주전자를 아예 집에서 들고 술을 사러갈 때가 많았다. 막걸리를 사 오면서 주전자 주둥이에 입을 대고 많이 마셔본 적도 있을 것이다. 막걸리 주전자를 아버지는 들어보면 이 놈이 오면서 많이 훔쳐 마셨는지 아닌지 다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한 번도 그런 내색을 않으시고 먼저 한잔 자시고 “너도 한잔 해볼래” 하시면서 한 사발 주면 돌아앉아 먹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 당시 마산 창동 골목 사이에 학사촌, 민속 토속주점들이 빽빽이 들어섰고 동동주가 한참 유행했다. 동동주라고 해도 옳은 동동주가 아니고 막걸리에 쌀을 띄워 놓은 것이 동동주였다. 우리들은 친구들과 밤새도록 마시고 그 당시 유행하던 송창식의 ‘고래사냥, 왜 불러’ 노래를 목청껏 불렀다. 그 이후 생맥주집이 한두 집 생기고 연인끼리 친구끼리 생맥주 집을 찿게 되면서 차츰 막걸리 대폿집은 사라져 갔다. 90년대 이후 쌀이 남아돌자 정부에서는 농촌을 살리기 위한 대안으로 쌀막걸리 제조를 허용했으나 이미 떠난 입맛을 돌리기는 역부족이었다.
그러나 전통술 제조기술이 기업화를 통해 품질과 이미지 개선에 성공하자 소주와 맥주가 주도하던 술 소비 시장이 분화되기 시작했고, 다양한 술맛을 기대했던 소비자들도 갖가지 맛의 전통술의 등장을 반기면서 최근 들어 새로운 막걸리 소비층이 생겨난 것은 참으로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특히 막걸리는 값이 싸고 도수가 낮아 부담없이 누구나 마실 수 있는 대중성에서 다른 주류보다 우위를 차지할 수 있다. 또한 쌀을 발효시켜 만든다는 강점이 있고, 제조기술과 재료를 다양하게 사용하여 소비층을 끄는 비결을 가지고 있다.
부산의 인삼 막걸리, 강원도의 더덕 막걸리, 칡 막걸리, 제주도의 조껍데기 막걸리, 지리산의 녹차 막걸리 등 지역마다 재료마다 다양한 브랜드의 막걸리를 개발해 속속 출시하고 있다. 옛 향취는 많이 사라졌지만 막걸리의 새로운 부활은 참으로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열무김치와 고추장으로 비빈 보리밥 한 그릇에 막걸리 한 잔이면 올 여름 폭염도 저 멀리 달아날 것만 같다.
강용범 (창원시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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