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저편 <77>
오늘의 저편 <77>
  • 경남일보
  • 승인 2012.04.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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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칠 대로 지친 민숙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일어나라. 갈 길이 멀다.”

아버지는 민숙에게 손을 내밀었다.

“다리가 아파서 더는 걸을 수가 없습니다.”

민숙은 울상을 지었다.

“이 아비가 업어주마.”

아버지는 딸 앞에 등을 들이댔다.

“아닙니다. 조금만 쉬었다 가면 됩니다.”

그러면서 업힌 민숙은 아버지의 등에 얼굴을 살며시 가져다 댔다. 태어나 처음으로 업혀보는 아버지의 등에서 느껴지는 따뜻함을 만끽하며 눈을 감았다.

인동 달인 약물사발을 들고 딸의 방으로 들어간 화성댁은 놀란 눈꺼풀을 찢어발겼다. 입을 비참하게 씰룩거리는가싶더니 약사발을 팽개치며 털썩 주저앉았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딸의 눈꺼풀을 열어젖혔다. 허연 동공을 보며 까무러치듯 딸의 가슴위에 풀썩 쓰러졌다.

“이년아, 너 혼자 가면 이 어미 어떡하라고. 같이 죽자 같이 죽어. 이 썩을 년아, 염병할 년아!”

별안간 얼굴을 치켜들곤 자기 가슴을 주먹으로 마구 두들기며 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방바닥에 머리를 쿡쿡 찧기도 했다.

때맞추어 형식과 진석은 민숙의 집 앞에 도착했다.

자전거 소리를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이제 화성댁은 팔다리를 활짝 펴 놓은 채 실실 웃고 있었다.

형식은 민숙의 집 마당으로 쑥 들어가서 자전거를 세웠다. 둘의 공통분모가 반색하며 달려 나올 화성댁의 모습을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일까. 찬물을 끼얹은 듯 너무 조용한 집안 분위기에 눌려 둘은 제바람에 긴장했다.

“저어, 계십니까?”

자전거에서 먼저 내린 진석은 민숙의 방 앞으로 와락 당겨갔다.

“아주머니, 민숙 누나!”

형식이도 민숙의 방문을 바라보며 조심스레 입을 뗐다.

“아니 민숙앗!”

방문을 열어젖히고 만 진석은 하얀 물감을 뒤집어쓴 것 같은 민숙의 얼굴을 보며 비명을 질렀다. 그녀의 죽음을 확인하는 건 죽기보다 두려워서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로 선뜻 다가가지 못하고 있었다.

“아주머니! 민숙 누나!”

실성한 사람처럼 웃고 있는 화성댁을 본 형식이도 비명을 질렀다.

화성댁의 얼굴에 넘실거리고 있던 웃음기가 갑자기 싹 걷혀지는 순간이었다.

“이노옴, 내 딸 살려내!”

느닷없이 몸을 일으킨 그녀는 진석의 멱살을 잡고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따져보지 않아도 잘못한 것이 없는 진석은 목을 축 늘어뜨린 채 상대가 잡고 흔드는 대로 흔들려 주었다. 말로는 다할 수 없는 아픔이 굵은 눈물방울로 둥글려져 방바닥으로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 자리에 맥없이 무너져 내린 형식이도 어깨를 들먹이며 소릴 죽여 울음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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