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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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남일보
  • 승인 2012.04.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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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명영 (경남도교육청 장학관)
봄이 오면 겨울 내내 수장하고 있던 꽃잎을 살며시 내밀어 꽃을 피운다. 매화, 목련꽃, 개나리 등 형형색색으로 뽐내고, 꽃잎이 바람에 날릴 즈음 노란색 새순을 밀어 올린다. 점점 산천을 녹청색으로 변화시키고, 여기저기 장미와 아카시아꽃으로 눈부시게 찬란하며 향기에 도취되어 심장이 ‘콩닥콩닥’거리는 오월에 유달리 기념일이 많다. ‘근로자의 날’부터 열한개 이상이다.

기념일은 나이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는 것 같다. 유독 ‘어버이날’과 ‘부부의 날’이 가슴에 와 닿는다. 어버이날은 부모가 살아 카네이션을 달아드리고 선물을 준비하였는데 이제는 후회하는 마음으로 맞게 되고, 부부의 날을 챙기면 유난 떠는 것 같아 될수록 조용히 지냈다.

연암 박지원 선생의 서간첩을 읽으면서 어버이날을 다른 의미로 여기게 되었다. 선생이 안의 현감으로 있을 때 ‘아이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는 고을 일을 하는 틈틈이 한가로울 때면 수시로 글을 짓거나 때로는 법첩을 꺼내 놓고 글씨를 쓰기도 하거늘 너희들은 해가 다 가도록 무슨 일을 하느냐? 나는 4년 동안 ‘강목’을 골똘히 봤다. 너희들이 하는 일 없이 날을 보내고 어영부영 해를 보내는 걸 생각하면 어찌 몹시 애석하지 않겠니? 한창 때 이러면 노년에는 장차 어쩌려고 그러느냐? 고추장 작은 단지 하나를 보내니 사랑방에 두고 밥 먹을 때마다 먹으면 좋을 게다. 내가 손수 담근 건데 아직 푹 익지는 않았다.”

조선시대 아버지상은 근엄하여 마치 석고상을 닮았다고 여겼는데, 면학을 주문하면서 손수 담근 고추장을 전하는 글에서 깊은 정을 맛볼 수 있었다.

14년 전 어느 날, 택지 개발이 한창이던 안동 정상동 기슭에서 주인 모를 무덤의 이장작업에서 망자의 가슴에 덮인 한지에 한글로 쓴 편지글이다.

“당신 언제나 나에게 둘이 머리 희어지도록 살다가 함께 죽자 하셨지요. 그런데 어찌 나를 두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내 편지 보시고 내 꿈에 와서 자세히 말해 주세요. 꿈속에서 당신 말을 자세히 듣고 싶어서 이렇게 써서 넣어 드립니다. 이 편지 자세히 보시고 내 꿈에 와서 당신 모습 자세히 보여주시고 또 말해 주세요. 나는 꿈에는 당신을 볼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몰래 와서 보여 주세요’ 하고 싶은 말 끝이 없어 이만 적습니다.”

400여년 전, 남편을 땅속에 묻으면서 꿈에서라도 모습을 보여 달라는 편지를 관속에 넣은 여인의 마음이 너무 애절하지 아니한가.

편지는 생각을 하고 준비가 돼야 쓸 수 있고 우표를 붙여 우체통에 넣어야 비로소 전달이 가능하다. 또 봉투를 개봉하고 음미하면서 천천히 읽어야 보낸 사람의 마음까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인터넷 시대를 우려하여 ‘검색보다는 사색’을 강조하고 있다. 가정의 달, 집집마다 가족에게 우표 먹은 편지가 배달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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