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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평사 창립 89주년 <상>진주 형평운동의 발자취평등한 세상 꿈꿨던 사람들이 있었다
곽동민  |  dmkwak@g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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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2.04.24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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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형평사 제6회 정기 전국대회(1928년) 포스터
진주정신의 근간을 이루는 인본주의의 전통. 그중에서도 진주에서 태동한 형평사는 한국 근대사의 인권과 평등의 집합점이었다. 최근 진주지역 뿐 아니라 전국적으로 대한민국 인권운동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형평운동을 재조명 하고 형평운동이 남긴 뜻을 계승하기 위한 실천적 노력들이 이어지고 있다. 본보는 형평사 창립 89주년을 맞아 형평운동의 역사와 의의를 살펴보고 그 현대적 의미를 되짚어본다.

“공평(公平)은 사회의 근본이요, 애정(愛情)은 인류의 본량(本良)이다. 연(然)함으로 아등(我等)은 계급을 타파하며 모욕적 칭호를 폐지하며 교육을 장려하야 우리도 참사람이 되기를 기(期)함이 본사의 주지이다” - ‘형평사 주지’ 중에서

◇형평운동의 시발점이된 동석예배 거부 사건

진주에 개신교가 처음 전파된 1905년, 호주 장로회 소속 의료 선교사인 카를 목사가 옥봉리 교회(현재의 봉래동 진주교회)를 세웠다. 카를 목사는 진료소와 학교를 세워 병으로 힘든 사람들과 배우지 못한 사람들에게 봉사했다.

이 소식은 백정들에게도 전해졌고 백정 집단 거주지역인 옥봉에 예배소가 설립돼 백정들은 따로 모여 신앙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1909년 리알 목사가 오면서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는 백정 신도들도 다른 사람들과 함께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주장했고 일부 교인들은 그의 주장에 반대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1909년 5월 둘째 주일 15명의 남녀 백정들이 일반인 신도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기 위해 교회 안으로 들어서자 리알 선교사의 뜻에 따르던 30여명만 남은채 200여명의 신도들이 교회 밖으로 나갔다.

옥봉리 교회는 결국 7주만에 종전처럼 두 군데서 예배보는 방식으로 되돌아 갔고 이 동석예배 거부 사건은 백정들에게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대우 받을 수 있다는 희망과 당시의 관습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좌절을 동시에 안겨준 사건이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백정들에게 있어 훗날 형평운동으로 발전하는 귀한 경험이 됐다.

◇형평사와 형평운동

동석예배 거부사건이 발생한지 14년이 지난 1923년 4월24일, 당시 경상남도 진주면 대안동의 진주 청년회관에 약 70여 명의 사람들이 모였다. 참석자들은 대부분 백정 출신이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다. 그것은 조선왕조 500년 동안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아온 백정들에 대한 사회적 차별을 없애고 평등한 인간 대우를 실행하고자 하는 단체의 첫 모임이었다. 곧 형평사 기성회였다.

당시 사회상에 비춰볼 때 백정들이 버젓이 공개적으로 모였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놀라운 일이었다. 더구나 형평사는 활동 범위를 진주로 제한하지 않고 전국적인 백정 해방 운동으로 이어간다는 기본 목표를 뚜렷이 세운 모임이었다. 전국적·조직적으로 인권과 평등을 구현하고자 하는 근대사회로 발전해 나가는 일대의 사건이었다.

당시 모였던 70여 명의 사람들은 다음날인 25일 형평사 발기 총회를 열고 형평사 전반에 관한 주요 사항을 공식적으로 결정했다. 형평사 창립 취지를 담은 ‘형평사 주지(主旨)’, ‘형평사 사칙’ 등을 정하고 회원들의 교육과 다른 지역에 형평사 취지를 알리는 일 등도 논의했다.

◇누가 형평사를 만들었나

형평사는 백정의 권익을 위한 단체였다. 그러나 백정들이 주축이었지만 백정 출신이 아닌 사람들도 다수 참여했다는 점에서 대한민국 사회운동의 효시라고 평가 할 수 있다.

발기 총회를 통해 선출된 임원 중에서도 백정 출신이 아닌 강상호, 신현수, 천석구가 포함돼 있었고 이들은 진주의 사회활동가들이었다.

형평사 창립에 주도적 역할은 한 강상호(1887~1957)는 진주 3·1만세 운동을 주도한 탓에 1년간 감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그는 감옥에서 나온 뒤 당시 ‘동아일보’ 초대 진주 지국장을 역임하며 노동공제회, 공존회 등 교육·노동 운동 단체에서 열성적으로 활동하던 사회운동가였다.

형평사 창립 당시 ‘조선일보’ 진주 지국장을 맡고 있던 신현수(1893~1961)나 천석구 역시 진주저축계, 진주금주단연회 같은 여러 사회운동 단체에 참여하고 있었다. 이들외에도 진주노동공제회나 진주청년회 등의 진주 사회운동 단체들이 형평사 창립을 적극 지원했다.

이처럼 백정 출신이 아닌 지도자들과 사회운동 단체의 지원이 있었지만 그래도 형평운동을 이끈 중추 세력은 백정들이었다.

형평사의 창립 사실은 백정들뿐 아니라 국내외의 많은 사람들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특히 보수와 진보의 이념을 떠나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 일으켰고 언론도 형평사를 적극 지지하고 나섰다. 짧은 기간에 전국적으로 주목을 받은 형평사는 이후 5월13일 전국의 백정 유력자 400여명을 한자리에 모아 형평사의 창립 축하모임을 진주좌(현재의 몰에이지)에서 갖게 된다.

◇반(反) 형평운동에 부딪힌 형평사

1923년 5월13일 형평사 창립기념식이 열린지 열흘이 지난 5월24일, 진주지역 24개 동·리의 농청 대표자들은 시내에 자리한 중안동 동사무소에 모여 형평사 반대를 다짐했다.

이들은 쇠고기를 사먹지 않기로 결의하고 시내 전역을 돌며 형평운동 반대의 목소리를 높였다. 둘째날 부터는 본격적인 쇠고기 불매운동을 벌이기 시작해 마을마다 쇠고기를 사먹는 집이 있는지 감시하고 협박했다.

반대운동이 사흘째로 접어들던 날 24개 동리에서 온 농청 대표자 70여명은 비교적 진주 시내에서 가까운 의곡사에 모여 형평사에 관계하는 자는 백정과 동일한 대우를 할 것, 쇠고기를 절대 사먹지 않을 것을 동맹할 것 등 형평사를 배척하는 5가지 사항을 결의했다.

당시 형평사 반대 활동은 진주 전체를 떠들썩하게 만들었고 형평사원들이나 후원단체 회원들은 신변의 위협과 생활에 곤란을 겪었다.

역사학자들에 따르면 당시 형평사 반대 활동의 배후에는 3·1운동 이후 사회개혁 세력이 힘을 얻자 이를 불만스럽게 여기던 지주세력과 수구단체들이 있었다.

진주에서 벌어진 형평사 반대 운동은 같은해 6월 중순께 큰 사고 없이 끝났지만 이 사건 이후 전국 곳곳에서 형평운동 반대 움직임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그러나 그때마다 형평사원들은 차별대우의 부당함을 적극적으로 공론화 시켜 저항해 나갔다.

◇형평운동의 퇴조

창립 1년만에 전국에 80개 조직체를 구성할 정도로 급속도로 발전한 형평사는 본사 위치와 운동방향을 놓고 둘로 갈라지게 된다.

본사 위치에 따라 진주파와 서울파로 나뉜 두 세력은 1924년 4월25일 창립 1주년 행사도 진주와 서울에서 따로 열렸다.

게다가 1930년데로 들어서면서 해소론을 둘러싸고 내부에서 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해소론은 형평사를 해체한 뒤 각 부분별 계급운동에 참여해 더욱 효과적으로 활동을 벌이자는 주장이었다. 해소론을 둘러싸고 진보적인 젊은층 지도자들은 해소론 지지를, 노장층 지도자들은 형평운동의 특수성을 강조하며 해소론을 반대했다.

젊은 활동가들의 뜻대로 형평사 해소안이 이뤄지지는 않았지만 1931년을 기점으로 형평운동은 침체되기 시작했고 1920년대 후반 전세계에 불어닥친 경제공황으로 더욱 어려움에 처했다.

이러한 환경속에서 형평사는 일제의 탄압까지 받게 된다.

1933년 초부터 일제 경찰은 뚜렷한 이유 없이 형평운동가들을 잡아 가두기 시작했다. 일제 경찰은 검거 시작 7개월 만에 탄압 이유를 형평사가 ‘형평청년전위동맹’이라는 공산주의 운동조직을 결성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이 사건으로 형평사의 소장층은 완전히 와해됐고 그 사이 형평사는 인권운동의 본래 취지를 상실한 채 이익단체로 전락해 갔다. 결국 1935년 4월24일 13차 정기 전국대회에서 형평사는 대동사로 명칭을 바꿨다.

대동사로 이름을 바꾼 뒤 의 활동은 사원들의 경제 이익을 지키는데 치중했고 경제적 이익에 매달리는 이익 집단으로 전락해 훗날 일제에 적극 협력하는 부역 세력으로 기록되기에 이르렀다.

자료제공=형평운동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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