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저편 <81>
오늘의 저편 <81>
  • 경남일보
  • 승인 2012.04.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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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 쪽으로 돌렸던 목을 얼른 앞으로 끌어왔다. 얼굴도 본 적이 없는 민숙에 대한 감정은 정자로서도 한마디로 요약할 수가 없었다. 속마음의 흐름을 좀 더 사실적으로 표현하면 신랑이 친누이 이상으로 좋아하는 정말로 그냥 누나라고 확실하게 단정을 짓고 싶을 뿐이었다. 신랑이 민숙을 여자로 보고 있지 않을까 하는 지레짐작 같은 건 죽기보다 더 하기 싫었다.

그렇더라도 정자는 화성댁을 볼 때마다 세상 어머니들의 공통분모인 특유의 아픔이 느껴졌다고나 할까. 더욱이 처음부터 미운감정 같은 건 생기지도 않았다. 발길을 화성댁 집으로 당겨가던 정자는 별안간 서쪽하늘로 눈을 올렸다. 시집온 지 사흘도 되지 않은 새색시가 벌써부터 마을 다닐 궁리를 해도 되는지 해에게 묻고 싶었기에. 방금 전까지만 해도 벌건 몸을 다 보여주던 해는 노을로 하루를 뒤풀이하기 바빴다.

시야에 화성댁의 집 뒷벽이 보이고 있었다. 제바람에 두근거리는 가슴을 누르며 정자는 본능적으로 뜸을 들이듯 걸음걸이를 조금 늦추어 정자나무 쪽으로 눈으로 돌렸다.

“어머!”

그녀는 무심결에 눈을 크게 떴다. 노을빛 속으로 자전거를 타고 오는 사람을 본 것이었다. 뚫어지게 바라 볼 기회도 주지 않고 나타났다간 금방 또 사라져 버리곤 하던 터여서 그 얼굴을 정확하게 그릴 순 없지만 무작정 신랑이라고 확신했다.

‘누나, 조금만 기다려.’

민숙의 집이 저만치로 다가오자 형식은 호주머니 속에 들어있는 페니실린을 떠올리며 있는 힘을 다하여 자전거 바퀴를 저어댔다.

‘정말 돌아오는군요!’

담벼락 뒤에서 마을로 들어오는 신랑을 훔쳐보고 있던 정자는 우물이 있는 바로 오른쪽으로 몸을 재빨리 돌렸다. 물을 길어 집에 먼저 가 있기 위하여서였다. 무슨 몹쓸 짓을 한 것도 없으면서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어이쿠, 영 미안해서 어쩌나. 민숙이 년 깨어났지 뭔가?”

사립문에 나와 있는 화성댁은 저만치에서 오고 있는 형식에게 달려가며 호들갑스러운 목소리로 맞이했다.

똬리를 정수리에 올려놓고 물동이를 머리위로 막 들어 올리던 정자의 귀에 화성댁의 목소리가 닿았다. 내용까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었지만 민숙이의 이름은 분명 섞여 있는 것 같았다.

‘무슨 일이지?’

본능적으로 예민해진 정자는 앞뒤 없이 급히 허리를 세웠다. 물동이의 물이 출렁거리며 급히 뱉는 침처럼 땅으로 떨어졌다. 발걸음은 강한 자석이 이끌려가듯 화성댁 집으로 당겨져 가고 있었다.

“누나, 정말 깨어났어요!”

자전거에서 내리기 바쁘게 형식은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은 얼굴로 민숙의 방에 숫제 달려들었다.

‘이럴 순 없어. 친누이 방에도 저렇게 마음대로 드나들 순 없을 거야. 도대체 나와 결혼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을까’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민숙의 방으로 들어가는 형식의 뒷모습을 우두커니 지켜보고 있던 정자는 새신랑의 새색시로서 심함 모멸감을 느끼고 있었다. 설움을 참지 못한 성급한 눈물이 쪼르르 동공 밖으로 끓어 넘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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