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저편 <82>
오늘의 저편 <82>
  • 경남일보
  • 승인 2012.04.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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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엇, 어, 언제 와 왔수?”

물동이를 머리에 인 채 눈물을 흘리고 있는 정자를 본 화성댁은 엉겁결에 뒷걸음질을 치며 말까지 더듬었다.

상대의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정자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화성댁은 굳이 안으로 들어오라고 하며 민숙이가 죽도록 좋아하는 진석이도 와 있다고 힘주어 말했다.

정자도 이제 민숙이와 진석이가 서로 좋아하는 사이라는 것쯤은 대강 눈치를 채고 있었다. 그렇더라도 남몰래 웃음을 빼물며 좋아하고 있을 수가 없었다. 보지 않으려고 해도 여자의 육감적인 느낌으로 신랑의 마음을 다 읽어버리고 말았다.

그랬다. 신랑은 민숙에게 마음을 송두리째 다 빼앗기고 있는 것이었다. 숨겨둔 사람이 경성여자였다면 신랑 가슴의 밑바닥까지 의심하지 않아도 되었을 터였다. 민숙을 향한 애틋함의 뿌리가 한없이 깊게 느껴져서 정자는 신랑의 마음을 흔들어볼 엄두는커녕 절망에 휩싸였다.

정자는 담벼락에 기대어져 있는 자전거를 흘겨보기 시작했다. 발로 사정없이 차 버리고 싶은 충동을 누르며 그냥 머리를 집으로 돌렸다.

화성댁은 어지간히 난처한 얼굴로 형식을 부르며 빨리 집으로 돌아가라고 떠들어댔다. 그녀는 노파가 노기등등한 얼굴로 달려와 민숙의 머리채라도 잡고 흔들어댈까 봐 제일 마음이 쓰였다.

“알았어요. 가야죠.”

형식은 서둘러 일어나는 체하긴 했다. 진석에게 몇 번씩이나 누나를 또 불행하게 하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은 후에야 방에서 나왔다.

자전거에 오르기 전 형식은 서쪽하늘로 눈을 돌렸다. 진석을 향하여 환하게 웃던 민숙의 얼굴을 떠올리며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

뒤따라오는 자전거 소리를 들은 정자는 무심결에 종종걸음을 쳤다. 신랑의 눈초리를 등으로 느끼며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나요! 같이 가요. 물동이 자전거에 실어요.’

정자는 이런 말들이 뒤에서 들려오길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미안하다는 말까지는 기대하고 있지도 않았다. 그래도 신랑각시의 인연을 맺은 사이니까 내외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하는 기대감에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약간 오르막인데다 돌부리까지 툭툭 불거져 있어서 형식은 궁둥이의 힘까지 총동원하여 자전거 바퀴를 돌려댔다. 뜨거운 입김이 훅훅 내뿜어져 나오는 입으로는 이마에서부터 세로줄을 그은 땀이 흘러들어가고 있었다.

‘내가 아니고 민숙이었다면 허겁지겁 달려와서 받아주었겠지?’

정자는 도무지 아무 말도 걸어오지 않는 신랑의 눈길이 아직도 민숙의 집으로 그어지고 있는 건 아닌지 그것이 의심스러웠다. 양쪽 귀는 오로지 등 뒤로만 예민하게 열려있었다.

형식은 우선 멈추며 호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그냥 끌고 가는 편이 나을 것 같았던 것이었다.

‘저 사람은?’

비로소 정자의 뒷모습을 발견한 형식은 뭔가 뜨끔해 하는 얼굴로 손수건을 호주머니에 집어넣으며 목을 아래로 꺾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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