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저편 <84>
오늘의 저편 <84>
  • 경남일보
  • 승인 2012.04.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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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랑에게 곁눈질하다 말고 정자는 얼른 빈 물동이를 들고 일어났다. 전신에서 스멀거리는 모멸감을 짓씹으며 이빨을 바드득 갈았다. 이빨 가는 소리에 진한 고독이 묻어나고 있었다. 친정집으로 달아나고 싶은 충동이 가슴 밑바닥으로부터 회오리쳐 왔다.

“우리 새아기 곱게만 자라 물을 통 길어보지 않은 모양이구나.”

손자의 얼굴만 봐도 기분이 좋아지는 노파는 정자의 옷이 젖어 있는 것을 보면서 머리를 갸웃했다.

좀 길쭉하게 생긴 달이 하늘 한가운데서 구름 사이로 세상을 엿보며 하늘여행을 즐기고 있었다.

“이제 그만 건너가 보래도?”

누워 있던 노파는 몸까지 일으키며 정자를 보았다. 저녁을 먹은 후부터 줄곧 같은 말을 해오고 있었다.

“예 할머니. 조금만 더 주물러 드릴게요.”

정자는 고집을 부리듯 노파의 다리를 위에서 아래로 아래에서 위로 정성껏 자근자근 주무르고 있었다.

“부부간에 내외하면 못쓴다.”

더는 뜸만 들이고 있을 수가 없어서 노파는 목소리에 힘을 좀 주었다.

“예, 할머니.”

정자는 대답은 야무지게 하고 밖으로 나갔다. 그러나 신랑 곁으로 가고 싶은 마음은 모기눈물만큼도 생기지 않아서 마루 끝에 앉았다. 일없이 구름 사이로 숨바꼭질하는 달을 감상했다.

“사내들이란 족속들은 예부터 어떻게 생겨먹었는지 여우하곤 같이 살아도 미련퉁이 곰하고는 못살더구나.”

노파는 손자며느리에게 주입식 교육이라도 시키듯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주무세요.”

몸을 일으킨 정자는 사립문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새아가!”

“예엣?”

“여하간 떡두꺼비 같은 아들을 쑥 뽑아 놓아야 한다.”

뒤따라 나온 노파는 정자의 손을 꼭 잡고는 신방으로 이끌고 갔다.

“할머님, 제 발로 들어가겠습니다.”

정자는 몸을 뒤로 뺐다.

“얼른 하늘을 봐야 얼른 별을 딸 거 아니냐?”

정자의 손을 단단히 잡은 노파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둘을 합방시키고야 말겠다는 표정으로 방안으로 이끌고 들어갔다.

차마 노파의 손을 뿌리치지 못하고 정자는 따라 들어갔다.

형식은 잠에 빠져 있었다.

‘이놈을 깨워야 하나, 말아야 하나? 아니다. 새아기를 이불 속으로 밀어 넣는 편이 낫겠다.’

노파는 손자며느리의 볼록한 가슴 위로 가지런히 흘러내리고 있는 분홍빛 저고리의 옷고름을 슬쩍 잡아당겼다.

“할머니!”

정자는 손바닥으로 드러나는 가슴을 재빨리 가리며 다른 한손으론 노파의 손을 잡았다.

“생판 모르는 사람끼리 만났는데 서먹하기도 하겠지. 그렇더라도 부부란 자꾸 말도 섞고 마음도 섞고 또 뭣도 섞고 해야 정이 드는 법이다.”

노파는 정자를 반강제로 이불속에 밀어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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