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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봄이 아쉬운 것은 매화향 때문이라(26) 단속사지 야매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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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2.05.01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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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속사지 동·서 삼층석탑

 

음력으로 윤삼월이 끼어서인지 봄이 참으로 더디게 온다 싶더니만 세찬 바람이 세상천지를 뒤엎을 듯이 사나흘 동안이나 방방곡곡을 휘저으며 난리판을 치고 나서야 산들산들한 봄바람이 불어온다. 봄꽃들의 짙어진 향기에 묻어 봄갈이 한 논밭의 흙냄새와 새로 돋은 풀냄새가 야릇하게 상큼한 완연한 봄이다. 묵은 밭 양지에서 봄나물을 캐는 아낙이며 송아지가 까불거리는 이랑을 따라 쟁기질하는 잊혀진 풍경이 세월의 저편에서 파노라마처럼 줄지어 그려지는 봄의 들녘이 못내 그리워서 향수에 젖는 때다. 따사로운 봄 햇살을 포근하게 껴안고 고향집 마루청에 걸터앉으면 사방이 수채화요 천지가 풍경화다. “매화 옛 등걸에 봄철이 돌아오니” 하고 옛 시조 한 구절이 불현듯 생각나서 옛 피던 가지에 피었는지 보고 싶어 길을 나섰다.

길손들의 내왕도 없는 후미진 골짜기의 좁다란 논배미 어귀에 초연히 홀로 서서 풍우한설 마다않고 온갖 풍상 견뎌내며 의연한 자태로 수백년의 세월을 꽃피우고 섰을 단속사지 옆 운리의 야매가 보고 싶어서 대전~통영간 고속도로 단성 IC에서 차를 내렸다.

단성요금소를 나와 신호등 사거리에서 우회전을 하면 말끔하게 마련된 문익점 선생의 목화시배지와 전시관을 지나서 덕산방향으로 가다보면 남사예담촌이 요란스럽거나 야단스럽지 않은 예스러움으로 근엄하고 정중하게 예를 갖춘 듯이 차를 세운다. 대궐 같은 고택과 수백년의 고매가 회나무 두 그루를 일주문처럼 앞세우고 조선조에서 시간이 멈춰 버린 옛 마을을 지나쳐서야 어찌 탐매객이라 하겠는가.

골목마다 흙돌담이 키 한 질을 훨씬 넘는다. 이는 단절과 폐쇄를 위함이 아니라 말을 타고 골목길을 오가다보면 어쩔 수 없이 넘어다 보이는 무례함을 막고자 서로를 배려한 선인들의 뜻이리라. 돌과 흙을 켜켜이 쌓은 옛사람들의 솜씨가 투박한 듯 정교하고 예사롭지 않은 간결함이 멋스러움을 풍기는데 막힌 듯이 굽어 도는 골목길을 따라 들면 나뭇결이 골이 깊어 세월의 흔적을 일러주는 솟을대문이 집집마다 높다랗게 솟아 있다. 이참에 거드름이라도 한번 피워볼 요량으로 뒷짐을 쥐고 아랫배를 힘껏 내밀며 헛기침을 크게 하고 ‘이리 오너라!’ 하면 냉큼 마당쇠가 튀어 나올 것 같은데 육중한 대문은 열려 있어 문지방을 넘어들면 순간 타임머신을 탄 듯이 과거 속으로 한순간에 세월이 바뀐다.

기와지붕의 용마루는 당당하게 하늘을 받치고 도포자락 펄럭이던 누마루 앞의 뜨락에는 기나긴 세월의 온갖 풍상이 굳은살로 눌어붙어 불에 탄 듯 검어져 버린 매화나무는 집집마다 화사한 꽃잎을 그린 듯이 피웠다. 이중에도 하즙 선생이 심었다 하여 선생의 시호를 딴 원정매가 700년을 넘었다니 어찌 인간세수로야 가늠이 가당한가. 집주인 할머니는 자식따라 외지에 살고 있어 잠겨진 대문 앞에서 담장 너머로 황새목을 뽑다가 발길을 돌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고, 멀리 일본에서까지 원정매를 보려 왔다가 안타까워했던 이도 허다했다는데 얼마 전에 뒷담장을 한발 남짓 허물고 작은 출입구를 만들었단다.

탐매객을 위해 빈집을 열어버린 배려에 감사하며 출입구에 들어서니 괴목 한 그루가 정면으로 마주섰다. 가슴팍 높이의 아름드리의 몸통은 옹이가 사방으로 불거지고 속은 삭고 썩어서 통째로 비었다. 길손의 인생사 육십 여년의 삶에도 온갖 속이 썩었는데 630여년이라니 별별 속앓이가 오죽이나 했으련만 지난해에도 가지마다 감이 열려 옹골차게 붉혔다니 고마울 따름이다. 텃밭을 가로질러 앞마당으로 돌아들면 원줄기가  삭아서 불에라도 그을린 듯이 새까만 고매 한그루가 원정매이다.

700여년의 세월에 부대끼어 매조도의 그림 같은 굽은 가지의 끝자락은 떨어져 나가고 용틀임하는 원줄기도 고사하여 받아둔 씨를 발치 끝에 심었더니 아들나무가 돋아나자 원줄기의 밑둥치에서 기적처럼 새움이 돋아나 올해도 연분홍의 꽃을 피었으니 고맙고도 반갑다. 앞마당의 원정매는 개화의 성쇠로 흉년과 풍년을 예고했고 뒷마당의 감나무는 국난을 울음으로 귀띔하였다니 선인의 심은 뜻이 오늘에도 따사롭다. 감나무 옆 돌담장 사잇문 앞에서 다시 한 번 돌아서서 길을 터준 주인도 고맙고 감사하여 두루두루 안녕하시라고 깊숙하게 고개를 숙였다.

   

칠백년 갖은 풍상 뉘라서 알리요만

국태민안 빌어준 뜻 결초보은 하오리다.

청매실 푸르러서 감꽃이 피거들랑 

잰걸음에 달려와 잔 잡아 올리리다.

 

▲단속사지 운리 야매
운리 야매를 찾아 다시 덕산 쪽으로 차를 몰았다. 호암교 삼거리에 닿으면 입석마을 단속사지를 일러주는 황토빛깔의 이정표가 길마중을 나와 섰다. ‘호암동천’이라 새긴 빗돌이 길섶에 나와서 정중하게 길손을 반기는 호암마을을 지나면 진양 강씨의 절의정려각 옆으로의 남새밭에는 오동통하게 살이 찐 쪽파가 샛노란 장다리꽃 앞줄에 촘촘히 줄을 서서 군침을 돌게 한다. 살찐 쪽파 뽑아다가 끓는 물에 살짝 데쳐 백옥 같은 아랫도리 파란 줄기로 싸서 감아 초고추장에 찍어서 막걸리 한 잔 안주하면 억만 시름이 가노라 하직한다. 성미가 급하거든 장다리 동을 꺾어 된장에 찍어도 막걸리 안주로는 더 없는 일품이다. 훗날 누군가가 불러주기를 기대하며 길을 재촉하여 입석마을 지나 운리의 단속사지 동서 쌍탑 앞에 차를 세웠다.

절을 한 바퀴 돌고 나오면 걸어두었던 미투리가 세월이 흘러서 다 썩어 있었다고 했으니 그 웅장했던 대가람은 간곳이 없는데 보물 제72호와 73호인 동서 쌍탑과 어른 키 두 길도 넘는 당간지주만이 제자리에 남아서 흥망성쇠의 애환의 역사를 일러주며 섰는데 곳곳에 남은 주춧돌과 축댓돌은 대숲에 묻혀서 범종소리도 법고소리도 까마득히 잊은 채 잠들어 있다.  

석탑을 뒤돌아서 마을 쪽으로 들어서면 빤하게 보이는 골목 모퉁이에 고매 한 그루가 단정하게 자리를 잡고 섰다. 삭을 대로 삭은 옛 등걸의 작은 가지에도 점점이 하얗게 꽃을 피웠다. 고려 말의 문신 통정공 강회백 선생께서 단속사에서 공부할 때 심으셨다 하여 후일 선생의 벼슬이름을 딴 정당매이다. 640여년을 꽃피우고 있다니 신비스럽고 성스러울 뿐이다. 남명 선생은 이곳 단속사지에서 “정당매 푸른 열매 맺었을 때 ”하고 ‘유정산인에게’라는 시를 지어주며 사명당과의 후일을 기약한지도 사백수십년이 지났으니 세월의 깊이가 가늠조차 안 되는데 고작 칠십 생애를 두고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바동거림이 겸연쩍어 민망하다.

정당매를 지나 골목길 끄트머리에 서면 낭떠러지 아래 도랑 건너편의 논배미 어귀에 초연히 홀로 선 고매 한그루가 한눈에 들어온다. 마을사람들이 ‘나한터’라고 불러온 것으로 보아 단속사의 나한전이 있었던 자린가 싶다. 나한전 옛터에 백매화 한 그루를 심어두고 폐허에 서린 회포를 달래려 함이던가. 삼백수십여년의 기나긴 세월을 천왕봉 빗긴 설한풍을 고스란히 맞으며 나한전의 향불이 다시 피기만을 기다리며 엄동설한에서 봄을 불러오는 설중매이다. 세월의 깊이만큼 껍질의 골도 깊어 고사한 가지도 그림 같이 정겨운데 밑둥에서 갈래진 가지들이 긴긴 세월을 두고 서로를 껴안아 떨어지지 못하고 붙어버려 연리지가 되어버린 단속사지의 운리 야매는 풍요의 저편인 외진 곳에 섰건만 유혹의 향을 팔지 않으려고 꽃잎 하나 흩날리지 않고 절의를 지키며 초야에 홀로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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