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저편 <92>
오늘의 저편 <92>
  • 경남일보
  • 승인 2012.05.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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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9일 새벽이 짙어지고 있었다.

잠에서 먼저 깨어난 화성댁이 옆에 잠들어 있던 민숙을 깨웠다. 민숙은 잠이 덜 떨어진 눈을 비비며 진석을 깨우러 건넌방으로 갔다.

새벽 세 시에서 다섯 시 사이인 인시에 남의 집 부지깽이를 집어 와야 했다.

“새벽 네 시가 다 되어가는 것 같다.”

화성댁은 서쪽에서 흘러가는 달을 보며 나직한 소리로 중얼거렸다.

“저 혼자 다녀오면 안 되겠습니까?”

여우같은 순사의 눈을 잘도 피해 다닌 덕택인지 진석은 부지깽이 하나 집어오는 일쯤은 식은 죽 먹기보다 더 쉬울 것 같았다.

“가세. 민숙이와 난 망을 서 줄 테니까.”

화성댁은 굳이 따라나섰다.

진석이는 앞장서서 갔다.

마을은 우물 안에 잠겨버린 듯 조용하기만 했다. 사람 먹을 것도 없어서 소나무 속껍질을 씹어야 하는 판국에 생쥐들은 무엇을 빼앗아먹겠다고 들끓는 것일까. 굶주린 생쥐가 세 사람의 발 앞을 재빨리 지나가곤 하는 바람에 앞뒤 없이 움찔움찔 놀라고는 했다.

미리 점찍어 두었던 박 씨 집 사립문 앞에서 세 사람은 발걸음을 멈추었다. 진석은 팔을 안으로 넣어 걸어둔 문고리를 벗겼다.

노랗던 새벽달이 희멀건 얼굴로 맥없이 웃기 시작했다.

진석은 박씨 집 부엌문을 살그머니 열었다.

민숙은 침을 꿀꺽 삼켰다.

열린 문으로 달빛이 먼저 들어갔다. 진석은 옆으로 나란히 시커먼 입을 벌리고 있는 두 아궁이의 양옆을 한꺼번에 보았다. 한쪽 끝이 새까맣게 탔을 나무꼬챙이가 보이면 그냥 집어서 나가기만 하면 되었다. 은근히 당황했다. 손을 탈 염려도 없는 그런 것을 꼭꼭 숨겨 두진 않았을 것이라고 스스로를 달랬다.

눈의 반경을 넓게 그어댔다. 목까지 동원하여 사방으로 돌렸다. 달빛이 미치지 못하는 구석진 곳을 손으로 더듬어보기도 했다.

“어머니, 왜 이렇게 늦죠?”

민숙이가 초조히 중얼거렸다.

“글쎄다. 못 찾은 건가? 부지깽이를 안방에 갖다 두진 않았을 텐데 말이다.”

나올 때가 지났다고 생각한 화성댁도 초조해지고 있었다. 부엌에 들어가 본 적이 없을 것이라는 점을 감안하여 집집마다 부지깽이는 아궁이 바로 옆벽에 붙여 세워두거나 땅바닥에 놓아둔다고 진석에게 단단히 일러주었다. 그녀의 생각으론 찾지 못할 이유가 도무지 없는 것이었다.

“제가 들어가 볼까요?”

민숙은 사립문 안으로 성급히 괭이걸음을 옮겨놓고 있었다.

“안 돼!”

급한 화성댁은 민숙의 뒷덜미를 잡고 끌어당겼다.

“아, 알았어요.”

도로 끌려나오며 민숙은 중요한 사실을 되새김질했다. 부지깽이를 집어오는 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오빠 혼자 해야만 한다는 것을.

결국 진석은 빈손으로 부엌문을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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