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저편 <95>
오늘의 저편 <95>
  • 경남일보
  • 승인 2012.05.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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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 밖에서 진석을 기다리던 민숙은 주먹손을 펴선 손바닥으로 감싸고 있던 시계를 또 보았다.

밤 9시 20분이 넘고 있었다. 통금인 10시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거니와 단 한 번도 이렇게 늦어 본적이 없었다.

‘무슨 일일까?’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인 민숙은 골목 밖에까지 나가 서성이다간 역마차를 이끄는 조랑말 소리만 나면 무작정 큰길로 달려가곤 했다.

진석은 선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별안간 눈꺼풀을 사정없이 찢어발기며 둥근 동공을 다 드러내기도 했다. 술에 물든 그 망막의 파문 속에선 그의 반 아이인 필중의 모습이 다가왔다가 멀어져 가곤 했다.

부모를 일찍 여윈 필중은 할머니와 단둘이 살아가고 있었다. 새벽에는 신문을 돌리고 저녁에는 국밥장사를 하는 조모를 돕고 있으면서도 학업성적이 아주 우수했다. 결석은 커녕 지각조차 하지 않았던 녀석이 며칠 째 학교에 나오지 않고 있었던 것이었다.

진석이가 국밥집에 딸린 단칸방에서 살고 있던 녀석을 찾아갔을 때 참선하는 승려처럼 벽을 향하여 꼼짝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평소에 인사성이 밝던 녀석이어서 내심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필중아, 나하고 이야기 좀 하자. 응?”

헛기침을 하다 지친 진석은 녀석 옆에 붙어 앉았다.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아이쿠 선생님, 우리 필중이 저놈 어떡하면 좋슈?”

노파는 진석의 손을 덥석 잡으며 주름진 얼굴에 파묻힌 작은 눈으로 눈물부터 지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그 놈의 자식이 나타나지 말았어야 했는데…….”

뜬금없이 말하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 내용을 알아야만 필중이를 바른길로 잘 이끌어갈 수 있습니다.”

진석은 자신도 모르게 굳어 어조로 말했다.

“우리 필중이가 저 아비를 만났지 뭡니까유?”

왠지 진석의 눈을 피하듯 목을 저쪽으로 돌리며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아, 아니 필중이가 아버님을요?”

진석은 앞뒤 없이 눈을 크게 떴다. 담임으로서 알고 있는 필중의 가족사항은 할머니와 단둘이 살아간다는 그것이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녀석이 아주 어렸을 때 돌림병으로 한꺼번에 세상을 떠났다고 그렇게 전해 듣고 있었다.

“죽은 듯이, 없는 듯이 그렇게 지낼 것이지…….”

노파는 꼭꼭 숨겨두었던 아들의 사연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필중의 아버지는 나환자였다. 어머니는 남편에게 천형이 내려진 것을 처음 알게 되었던 그때 가족을 버리고 달아나 버렸다.

“허허허!”

진석은 정신 나간 얼굴로 어이없이 웃었다.

<역마차: 해방직후에 등장한 교통수단. 조랑말이 방울소리를 내며 이끌었으며 승합마차라고 불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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