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저편 <103>
오늘의 저편 <103>
  • 강민중
  • 승인 2012.05.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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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중이는 영리하고 착실한 아이잖아요. 곧 돌아올 겁니다.”

“이놈의 자식 어디 가서 나쁜 생각 같은 건 하지 않겠쥬?”

노파는 퀭해진 눈으로 민숙의 동의를 간절하게 구했다.

“온갖 정성을 다해 키워온 어르신을 혼자 남겨두고 어찌 그런 생각을 하겠어요. 절대로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필중이가 어떤 아이인데 그만한 일 하나 이겨내지 못하겠습니까?”

‘도대체 아이한테 무슨 일이 있었을까?’

궁금증이 바짝 달아오른 민숙은 에둘러서 넌지시 물었다.

“그렇죠? 이겨내겠쥬?”

노파는 손자의 안전에 대한 확인이라고 하려는 듯 힘주어 물었다. 민숙이가 알고 있을 것이라고 여겼는지 아니면 사태의 심각성을 까발려 공통분모를 더욱 튼튼히 다지고 싶었던지 필중이 아버지가 나환자라는 사실까지 술술 엮어댔다.

“그랬군요.”

민숙은 뒷머리가 멍해 옴을 느꼈다. 남편이 방황할 수밖에 없는 그 이유가 가슴에 기막힐 정도로 잘 와 닿고 있어서 차라리 진저리를 쳤다.

“왜 그러세유?”

노파는 노래진 민숙의 얼굴을 두려운 눈초리로 뜯어보기 시작했다.

“아,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필중인 잘 이겨낼 겁니다.”

민숙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머리와 가슴에서 남편에 대한 생각들이 물밀 듯이 일어났다. 남편의 아픔이 온몸의 저림으로 다가왔다. 가출한 필중이 걱정에 사로잡힐 마음의 여유가 빈대 눈물만큼도 생기지 않았다.

‘먼발치에서 보았으면 되잖아?’

훌쩍 커 버린 아들의 얼굴을 좀 더 가까이에서 보려고 했던 필중이 아버지의 저린 마음 같은 건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이기 때문에 나중에 아들이 받을 충격부터 염두에 두어야 옳았다.

민숙은 시댁으로 가고 있었다. 높은 가을하늘과 땅 사이에 구름 한 점 없기 때문일까. 머리위로 내려온 한낮의 햇살이 한여름보다 더 따가웠다.

“아니 새아가! 내일부터 약 먹으러 오라고 하지 않았니?”

내일 새벽부터 약을 달일 궁리를 하고 있던 여주댁은 의혹이 가득한 눈으로 민숙을 보았다. 본능적인 불안감이 그녀의 뇌리를 싸하게 훑고 지나갔다.

“어머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민숙이는 잔뜩 굳은 얼굴로 정색을 했다.

“그, 그으래?”

며느리에게서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여주댁은 반격의 기회를 노리는 공격수처럼 눈빛을 날카로이 새웠다.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제바람에 딱딱하게 말했다.

“아이 문제라면 듣지 않겠다.”

딱 잘라 말했다. 아들에게 세뇌당한 며느리가 시어미를 설득하러 왔을 것이라고 그렇게 여주댁은 재빨리 단정 지은 것이었다.

“아일 갖지 않겠다는 건 아닙니다.”

“그럼 뭐냐?”

“당분간만 저희들한테 맡겨주십시오.”

그리고 민숙은 남편의 상황을 설명하기도 전에 가슴이 미어져 그냥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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