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시는 발견된 우물을 상징적으로 복원, 빨래터로 재현할 계획으로 역사의 교육장으로 활용하는 문화재로서의 가치를 높이기로 했다. 발견된 우물은 진주성 내의 옛 우물터 4기(추정) 중 1기로 지난해 12월 진주성 내 우물 복원에 따른 문화재 발굴조사의 일환으로 추진됐다. 시는 진주성 내 거주자의 기억을 토대로 경남발전연구원 조사단에 의뢰, 지난 5월 9일부터 발굴조사를 실시하고 있다. 우물 규모는 내부너비 150㎝, 외부너비 250㎝의 크기이며, 바닥은 현재 조사 중으로 170㎝ 이상 깊이로 파악되고 있다.
사실 진주는 1000년 고도(古都)가 분명하고, ‘문화·역사의 도시’를 자부하면서도 역사적 고증과 상징물이 너무 빈약하다. 고대부터 진주성은 경치가 좋아 영남제일 형승지(形勝地)란 명성을 가졌으나 고도라고 내세울 것이 별로 없다. 진주성의 북장대 남쪽의 우병영은 1604년부터 구한말까지 300여 년 간 군사의 중심지였다. 우병영 자리는 1985년 진주관찰부 1년간을 포함, 1986년부터 1925년 경남도청이 부산으로 이전하기까지 경남관찰부 등 30여 년 간 도청인 선화당도 흔적도 없다. 이런 의미에서 진주성 내 우물 복원은 역사의 교육장으로 큰 가치가 있을 것으로 다른 곳의 샘(泉)과 우물도 복원이 필요하다.
진주성 내의 우물은 임진왜란 진주성 전투에서 적은 군사로 싸워 진주대첩을 이룬 결과는 진주성 안에 자체적으로 물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발견된 우물은 발굴조사가 계속 진행 중인 만큼 문화재적 가치가 더욱 높은 유물들도 발굴되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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