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저편 <110>
오늘의 저편 <110>
  • 경남일보
  • 승인 2012.06.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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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째 흔들이고 있는 제자를 위해 아버지 이야기를 털어놓으려고 한 거 아니었어? 빨리 훌훌 털어버려. 넌 선생이잖아? 선생이라면 제자의 운명이 걸린 문제인데 표본이 되어 주어야지. 안 그래?’

가슴이 제바람에 뜨거워지면서 숫제 진석을 들볶아대고 있었다.

‘소문이 나면 난 끝장이야.’

진석은 한탄하듯 가슴을 툭 쳤다.

‘필중이는 똑똑한 아이다. 자기 자신의 표본을 자기 입으로 깨뜨리는 짓은 절대로 하지 않을 거야.’

‘표본? 내가 녀석의?

진석은 가슴의 소리에 귀가 솔깃해지고 있었다.

‘그렇다. 그리고 넌 녀석을 표본으로 삼으란 말이다.’

‘명색이 선생이 제자를 표본으로 삼으라니 그게 말이 되니?’

진석은 발끈했다.

‘너한테도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 표본이잖아?’

너무 솔직한 가슴의 속삭임에 말문이 막혀버린 진석은 일없이 허공으로 눈을 돌렸다. 상수리나무 나뭇잎 사이로 하얀 뭉게구름이 들락거리는 것을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느 순간 진석은 화가 단단히 난 얼굴로 방안에 도로 들어갔다.

“돌아가시라니까요?”

산을 내려간 줄로만 알았던 담임이 다시 방안으로 들어가자 필중은 본능적으로 벌떡 일어나 앉으며 볼멘소리를 냈다.

“갈 때 가더라도 여기까지 올라온 값은 하고 가야겠다. 하늘이 무너지기라도 했니? 사내자식이 이까짓 일로 이러고 있는 꼴을 보니 한심하다 한심해. 너 같은 놈은 불알 달고 있을 자격이 없다. 당장 불알부터 떼어버려라.”

진석은 아예 목청을 높이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소리를 버럭버럭 질러댔다. 그리고 는 속이 아주 시원하다는 얼굴로 필중을 노려보았다.

“이까짓 일이라뇨? 선생님 일 아니라고 너무 쉽게 말씀하시지 마세요.”

필중은 답답한 표정으로 울먹이기 시작했다.

“사내자식이 이젠 찔찔거리기까지……. 필중아, 이 선생님 아버지도 나환자였다면 믿겠니?”

목이 메여 옴을 느끼며 진석은 정색을 했다.

“예엣? 제가 뭐라고 그런 거짓말까지 하세요?”

어이없이 놀라던 필중은 이내 난처한 표정으로 진석을 곁눈질했다.

“거짓말이었으면 얼마나 좋겠니?”

눈앞에서 돋아나는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피하듯 진석은 습관처럼 눈을 감아버렸다. 제자 앞에서 차마 한숨까지 터뜨릴 수는 없어서 가슴을 손으로 꾹 누르며 심호흡으로 유인했다.

“진짜, 정말이세요?”

얄밉고 괘씸하게도 녀석의 얼굴에 속셈이 빤한 그런 희망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래, 그렇다고 그렇게 노골적으로 날 비상탈출구 보듯 하니?”

진석은 일부러 피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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