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저편 <121>
오늘의 저편 <121>
  • 경남일보
  • 승인 2012.06.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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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마 서울나들이를 다음으로 미루자고 하시는 건 아니겠지?’

 그녀 얼굴에 불안감이 엉기고 있었다.

 “아무 것도 아니다. 첫차 타려면 새벽같이 일어나야 하잖니?”

 노파는 정자에게 빨리 잠자리에 들라고 하곤 자리끼 사발을 집어 들었다.

 건넌방으로 온 정자는 농짝 문을 열었다. 때깔이 제일 고운 옷을 장롱에서 꺼내선 구겨진 데가 없는지 꼼꼼하게 살펴보았다.

 ‘귀밑머리 풀고 만난 사이인데 내치진 않겠지?’

 은근히 놀랄 남편의 모습을 떠올리며 정자는 공연히 서러움이 북받쳐 옴을 느꼈다.

 가게에서 그리 멀지 않은 살림집으로 온 형식은 얼굴을 좀 찌푸리며 방으로 들어갔다.

 “갑자기 왜 그런 거야?”

 핏기 없는 얼굴로 누워 있는 수향이를 보며 형식은 퉁명스런 말투로 물었다. 민숙이의 결혼식을 끝까지 보지도 않고 서울로 달려왔던 그는 그야말로 홧김에 술집여자인 수향이와 살림을 차리고 말았던 것이다. 

 수향이는 눈물만 흘릴 뿐 입을 꾹 봉하고 있었다.

 “쯧쯧, 불쌍한 인사들…….”

 먼저 와 있던 옆집 노파는 형식과 수향이를 번갈아 보며 혀를 찼다. 노파는 평소에 산파역을 잘 하기로 소문이 나 있을 뿐 아니라 체기가 있는 사람에겐 손끝도 따주고는 했다.

 “이 사람한테 무슨 일이 있는 겁니까?”

 형식은 수향에게 그어져 있던 눈길을 노파에게로 끌어갔다.

 “애가 떨어졌수.”

 노파는 안타까움이 잔뜩 실린 음성으로 툭 쏘아붙였다.

 “네엣?”

 형식은 눈꺼풀을 사정없이 치켜들었다. 그리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불쌍한 내 아기…….”

 수향이는 기어이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 남자 저 남자에게 술을 따랐던 주제에 멀쩡한 총각을 만나 결혼할 생각은 꿈도 꾸지 못했다. 소원이 있다면 딱 한 남자만의 사랑을 받으며 사람답게 살아보는 것이었다.

 형식과 함께 살면서 수향이는 늘 자신의 위치에 대한 불안감에 시달렸다. 아이가 들어서면서 이제 겨우 마음의 안정을 누리고 있던 차였다.

 형식은 우는 수향이를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녀와 동거하면서 아이가 생길 수 있다는 건 생각하지도 못했다. 솔직히 말해서 그녀의 배를 빌어 자식을 얻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그렇더라도 자신의 피를 받은 생명이 세상에 태어나 보지도 못하고 잘못되어 버렸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착잡했다.

 ‘제발 한 말씀만 해 주세요. 아이는 또 가지면 되니까 몸과 마음을 빨리 추스르라고. 예? 예?’

 수향이는 울면서 형식을 향하여 소리 없이 부르짖고 있었다.

 “미역 사놓은 거 있수?”

 노파는 몸조리를 잘 하지 않으면 다음에도 아이가 떨어질 수 있다고 형식과 수향이를 번갈아 보며 겁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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