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일현 (한국폴리텍대학 항공캠퍼스 학장)
권력자들을 좋아하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미디어에 비친 그들의 모습은 고압적이고 위압적이며 무서워 보이기까지 한다. 국민들은 미디어에 비친 권력자들의 모습에 거듭 실망한다. 나는 국민의 귓속에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고 싶다. ‘선생님이 보신 권력자들의 모습이 정확합니다.’
과거나 현 정권이나 모두 마키아벨리 스타일의 통치를 본받아 삶의 도덕 없는 정치적 도덕을 내세웠다. 삶의 도덕에 무관한 정치적인 도덕이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이 무엇이기에 인간에게 허용될 악행이 있다고 믿는단 말인가. 동양적 사유에 따르면 그런 이상한 사고방식은 “천금의 재물은 흙으로 돌아가고, 삼공(三公)의 벼슬도 종놈과 한가지다”라고 했던 이식(李植)의 발밑에서 무가치함을 드러낼 뿐이다.
우리시대는 참으로 처량하다. 이런 권력적 상황을 그대로 인정하며 약육강식의 논리를 ‘더 큰 도덕적 행위’라며 변명한다. 보통 사람들은 온갖 힘을 동원해 재물과 벼슬을 좇는다. 최소한의 도덕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마저도 ‘에라, 나도 모르겠다’는 무철학·무의지 시대의 논리에 인생을 내던지고 만다. 칼 폴라니가 말했던 이른바 ‘세상 환멸의 시대’다.
그러나 다시 희망을 이야기하자. 탐욕스럽고 저열한 방법으로 부자가 되거나 바쁘게 내달려 출세에만 매달려 높은 자리에 오른 자는 모두 오래가지 못했다. 세상은 분수 밖의 복을 결코 가볍게 주지 않는 법이다. 세상이란 남들의 눈과 영향력, 인간적 한계의 요구와 같이 정상적인 삶을 향한 인간의 의지다. 이런 인간의 일반의지에 따라 보답하고 베푸는 데에 어김이 없어야 한다는 말이다. 흉악한 짓을 멋대로 하고 독한 짓을 마구해서 착한 사람들을 풀 베듯 하고서 스스로 통쾌하게 여기던 권력자들은 예부터 몰래 죽임을 당해 왔다. 인간의 일반의지가 그를 가만 놓아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극은 순환한다. 물질, 탐욕과 권력이 극으로 가면 세상은 그 극을 다시 원점으로 돌려놓는 법이다. 이 같은 세상의 이치는 신명스럽고 두려워할 만하다. 지금 이 말을 듣고 간담이 서늘한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믿고 국민을 농단하던 자들의 말로는 지금까지 늘 비참했다. 권력이 전환하는 지금, 많은 이들이 예외 없이 극단적인 권력의 말로를 맞고 있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이들이 자신이 행했던 극단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지고 후회할 것인가.
권력은 관리하되 소유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권력의 주인은 국민 즉 일반의지이기 때문이다. 권력이란 소유하면 휘두르게 되고, 관리하면 함께 누리는 법이다. 국민으로부터 권력행사를 위임받은 자들은 어린 시절의 눈과 귀로 돌아가야 한다. 그래야만 진정으로 국민과 사회와 소통할 수 있다. 사회를 바르게 볼 수 있는 파릇한 마음의 눈과 국민을 우러러보는 존경의 눈을 가질 수 있게 된다.
스토아 윤리에 따르면 최대한 이성적으로 삶을 대하려는 태도는 우리에게 자동적으로 도덕적인 선을 부여한다고 했다. 세네카(Seneca)의 철학처럼 권력자가 권력자다우려면 올바른 이성을 가져야 하고, 그래야만 선과 덕을 목적으로 가지게 된다. 권력의 감정에 빠져 이성을 포기하는 바보 같은 이들의 말로를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 이성적 인간미와 비조(悲調)의 감수성을 어울러 가진 세네카적인 영혼의 권력자를 기대한다.
권일현 (한국폴리텍대학 항공캠퍼스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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