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익진(鶴翼陳)진법
학익진(鶴翼陳)진법
  • 경남일보
  • 승인 2012.07.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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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기 (논설고문)
지난 8일은 420년 전인 임진년인 1592년 7월 8일은 이순신 장군이 한산해전에서 학익진(鶴翼陳·학이 날개를 펼친 듯한 진법)진법을 써서 일본 수군을 대파한 날이다. 이 장군은 수척의 판옥선을 전면에 내세워 일본의 병선을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해 일본전선 73척 중 59척이 대패하고 14척만 겨우 도망가는 대승을 거둬 임진왜란의 3대첩(三大捷) 중 하나로 일본해군을 크게 무찌른 전투인 한산대첩을 이루었다. 한산대첩은 그야말로 완승을 거둔 셈이다.

▶학익진 진법을 알지 못한 일본 적장 와키자카는 학익진을 키(곡식 따위를 까불러 쭉정이나 티끌을 골라내는 도구) 모양의 함대라고 일본기록에서 표현했다. 학익진이라는 새로운 개념의 진법을 몰랐던 적장의 눈에는 학익진이 곡식을 까불리는 키로 보였던 것 같았다. 학익진 집법을 몰랐던 적장은 대패할 수밖에 없었다.

▶임진왜란 때 용인전투의 승리로 인해 와키자카는 조선군을 지나치게 깔보고 있었다. 기세가 오른 왜의 수군이 쫓아간 곳에는 세계전사에 길이 남을 이순신이 펼쳐놓은 학익진이 기다리고 있었다. 적선이 자신의 생각대로 함정에 뛰어들자 이 장군은 모든 장수들에게 일시에 선회하여 적을 포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와키자카는 1만 명을 지휘했는데 참패해 1000여 명만이 생존했다”라는 일본의 기록이 있을 정도로 일본의 피해는 컸다. 한산도 대첩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꿈꾼 조선 정복의 야망에 사형선고를 내렸다. 수륙병진계획으로 조선을 무너뜨리고 명나라로 진격하려던 야욕이 이순신 장군의 조선 함대에 의해 한산도 앞바다에서 완전히 좌절되고 만 것이다. 이 장군이 승리를 거둔 것은 곁에는 죽기를 마다하지 않고 그와 함께 전장을 누빈 충직한 부하들이 있었기에 임진왜란 때 이 장군이 23전 23승의 신화가 가능했다.

이수기·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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