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일구 (창원보훈지청 보훈과장)
이어도를 찾다 실종된 기자를 뒤쫓는 해군장교의 이야기를 그린 이청준의 ‘이어도’를 펼치면 먼 바다의 파도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배를 타고 이어도를 찾아 떠났던 아버지가 시신으로 돌아오자 천 기자는 아버지를 그리며 한스러운 생을 보낸 어머님에 대한 기억이 유년의 어두운 그림자로 남아 있다. 천 기자에게 이어도는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저주의 섬이자 거부하고 싶은 과거요 현실이었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를 죽음으로 몬 이어도의 비밀을 파헤치겠다는 집념으로 살았던 천 기자는 술에 취한 채 자정이 지난 시각에 무엇인가에 홀려 아무도 없는 갑판으로 나간다. 그때 불이 환하게 켜져 있고 많은 사람들이 평화롭게 살고 있는 섬의 환상을 보았을 것이다. 그곳에는 돌아가신 아버지와 어머님, 어릴 때 죽은 동네친구와 많은 사람들이 어서 이곳으로 오라는 손짓을 거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천 기자는 그 환상을 본 후 배안에서 자취를 감춘다. 그후 군경의 대대적인 수색에도 행방을 알 수 없었던 천기자의 시체는 아무런 상처 하나 없이 얼굴에 희미한 미소를 띤 채 다시 이 섬으로 돌아왔다. 이어도는 아무리 힘들게 일해도 여전히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는 제주도 사람들의 쉼터이자 안식처였을 것이다.
이어도에 가 본 사람은 없다. 그러나 제주도 사람들은 이어도가 영혼이 머무는 곳이며 그 섬에 가면 힘들여 일하지 않고도 먹을 수 있다는 그 가난한 소망만으로 그토록 목마르게 이어도를 그리워한다. 이어도에는 다른 이상향처럼 금은보화가 굴러다니지 않고 꿀과 젖이 흐르는 땅이 아니라 일에 지친 서민들에게 일하지는 않고 살 수 있다는 희망을 주었던, 어쩌면 이 세상에서 가장 소박한 낙원이 아닐까.
이렇게 무더운 여름날이면 바닷속이 훤히 보이는 제주도로 달려가 파도에 안기고 싶다. 저녁이면 모래 기슭에서 하늘과 바다가 되는 섬, 별이 와르르 쏟아질 것만 같은 그 바닷가에서 파도의 울음소리를 듣고 싶다. 꿈속의 이어도를 그리워하며 이렇게 흥얼대는 아낙네의 노래소리는 묘한 파도의 철썩거림과 함께 오래도록 내 가슴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먹구름 성가시던 유년의 빈 뜰/돌담에 기대어 홀로 바다 꿈꾸면/샛바람 다정히 속삭여 주었지/그 꽃 피던 날의 이어도 사나.’
세상에는 천 기자처럼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안고 산다. 그 상처가 타인에 의해 생긴 것이든 자신의 잘못으로 생긴 것이든 그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사람은 결국 자신뿐이다. 이어도는 삶이 고달픈 제주도 사람들이 만들어낸 상상 속에서만 존재할 뿐 행복의 파랑새와 함께 이어도는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바로 이곳이 아닐까.
윤일구, 창원보훈지청 보훈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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