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인가…" 드라마, 정체성을 묻다
"나는 누구인가…" 드라마, 정체성을 묻다
  • 연합뉴스
  • 승인 2012.07.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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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시탈' '유령' '빅' '닥터진'…나를 찾는 드라마 봇물
"형 오늘 낯선 사람이 날 위해 죽었어. 이강토라면 치를 떨었을 사람이 내가 각시탈을 썼더니 날 살리겠다고 죽었어. 형 나 무서워. 내가 이걸(각시탈) 끝까지 쓸 수 있을까?"

지난 11일 방송된 KBS 2TV 수목극 '각시탈'의 한 장면.

일제의 충성스런 '개'인 순사 이강토와 조선인들의 얼굴 없는 영웅 각시탈. 180도 다른 삶을 동시에 살아가는 주인공이 정체성의 혼란을 느끼며 홀로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순간이었다.

SBS TV 수목극 '유령'의 주인공은 아예 '페이스 오프(face off)'를 통해 박기영이라는 인물에서 김우현이라는 인물로 완벽하게 탈바꿈했다.

하지만 외모는 김우현 자체가 됐음에도 김우현의 '히스토리(history)'는 내장하지 못한 박기영은 매순간 김우현 행세를 하는 데 있어 벽에 부딪힌다.

'나는 누구인가?'

지금 안방극장이 정체성이라는 화두에 머리를 맞대고 있다.

'내가 아닌 다른 나'를 꿈꾸거나 졸지에 생각지도 않던 다른 이의 삶을 대신 살아가게 되는 이야기들이 펼쳐지는 것. 주인공들은 저마다 극심한 정체성의 혼란에 직면해 있으며 그 과정에서 '과연 진짜 나는 누구인가'를 끊임없이 묻고 찾게 된다.

드라마 관계자들은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는 인간의 본능과 본질에 대한 이야기로 보편적인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데다 스릴러적인 요소를 갖추고 있어 극적 긴장감을 높이는 데도 유용하다고 입을 모은다.

◇가면을 쓰거나 얼굴을 바꾸거나 영혼이 바뀌기도 = KBS 2TV 월화극 '빅'에서는 교통사고로 30대 의사 서윤재와 10대 고교생 강경준의 영혼이 뒤바뀌는 사태가 발생했다.

강경준이 의식불명에 빠진 상태에서 서윤재의 몸으로 강경준의 영혼이 옮겨 들어가면서 벌어지는 일들은 난감한 상황의 연속이다.

지난 10일에는 서윤재의 약혼녀 길다란이 서윤재의 몸에 들어간 강경준과 사랑에 빠지는 야릇한 내용이 방송됐다.

'타임슬립(time slip)'을 소재로 삼은 MBC TV 주말극 '닥터진'에서는 등장인물들이 '환생'에 따른 극심한 혼란을 겪고 있다.

현대에서 조선시대로 시간 이동을 한 주인공 진혁은 물론이고, 그 주변인물들이 현대와 조선시대에서 각기 다른 모습으로 주인공과 관계를 맺게 되면서 기시감 등으로 인한 정체성의 혼란을 느끼게 된다.

또 앞서 거론한 작품들에 비해서는 그 설정의 수위가 낮긴 하지만 KBS 1TV 일일극 '별도 달도 따줄게'와 KBS 2TV 주말극 '넝쿨째 굴러온 당신'에서는 어려서 사고로 부모 손을 놓쳐버린 미아가 성인이 될 때까지 30여 년간 전혀 다른 인생을 살다 극적으로 뿌리를 찾은 후 겪는 혼란을 그리고 있다.

◇"정체성은 태고부터 이어져온 실존의 문제" = SBS 최문석 드라마 CP는 "정체성에 관한 이야기는 고대 희랍 비극부터 시작하는 인간의 본질에 관한 것"이라며 "신과 인간, 이성과 감성에 대한 논의처럼 오래된 문제"라고 말했다.

인간이 태고부터 현재까지 줄기차게 고민해온 테마이고 그렇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든 극화될 수 있는 보편적인 소재라는 것.

최 CP는 또한 "정체성은 실존과 본능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에 그 안에는 거대한 트라우마를 결부시킬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고 꼽았다.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이 곧 진실을 향해가는 여정인 만큼 그 속에 흥미로운 비밀을 잉태할 여지가 많고 그 비밀을 하나씩 풀어내는 과정은 시청자의 눈과 귀를 집중시키는 것이다.

◇문학의 흐름과 보조를 맞추기도 = 현재 안방극장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정체성에 천착하게 된 것은 최근 문학의 흐름과 보조를 맞추는 측면도 있다.

지난 6-12일 종합 베스트셀러 집계에 따르면 1위를 차지한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을 비롯해 힐링을 주제로 한 치유서들이 다수 눈에 띈다.

모두 '현재의 나'에 대한 불안과 번민, 고뇌를 다스리는 방법에 관한 안내서들이다. 이는 그만큼 현대인들이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복잡다단한 상황에 내몰려 있음을 보여주는 방증들인데 여기서 한발짝 더 나가면 '지금의 내가 아닌 또 다른 나'에 대한 현대인들의 욕망을 읽을 수 있다.

베스트셀러 집계에는 이와 함께 더글러스 케네디의 '빅 피처'와 박범신의 '은교'도 들어 있는데 이들 소설은 포기할 수 없는 삶에 대한 욕망과 닿을 수 없어 보였던 꿈의 실현을 그리고 있다.

'빅 피처'는 우발적인 사건으로 인해 신분 세탁을 하고 전혀 다른 사람의 삶을 살게 된 이가 그 덕에 포기했던 꿈을 실현하게 되는 과정과 그 속의 혼란을 밀도 있게 그렸고, '은교'는 칠십 노인의 성적 욕망을 상상의 힘을 빌려 구현하고 있다.

그에 앞서 2009년 첫선을 보이며 세계적으로 인기를 끈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는 달이 두 개 뜨는 밤이면 현실의 세계 뒤에 숨어 있던 전혀 다른 세상이 모습을 드러낸다는 설정을 통해 우리는 평소 자각하지 못하지만 지금과 다른 세상이 늘 우리와 함께 숨을 쉬며 굴러가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진짜 나'는 과연 존재하는가 = 현재 시청자는 각 드라마의 주인공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을 좇으며 함께 손에 땀을 쥐고 있다.

으레 결말은 '진짜 나'를 찾는 것으로 귀결될 것이라 예상되지만 그 와중에도 '진짜 나'라는 게 과연 존재하는가에 대한 의문을 제시할 작품도 있을 듯하다.

대표적으로 '유령'은 페이스오프를 통해 김우현으로 변신한 박기영이 다시 박기영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이에 대해 최문석 CP는 "김우현의 얼굴을 한 박기영이 현재 범죄를 수사하는 것은 당면 과제일 뿐 결국 '유령'이 그리는 것은 박기영이 앞으로 누구로 살아야 할 것인가에 있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최 CP는 "결국은 정체성을 탐구하는 게 '유령'의 핵심"이라며 "박기영이 어떤 선택을 할지, 그 선택의 이유는 무엇일지가 중요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빅'도 골치 아프다. 서윤재의 몸에 스며든 강경준의 영혼을 사랑한 길다란은 과연 누굴 사랑한 것인지, 서윤재와 강경준의 영혼이 제자리를 찾은 후에 둘은 과연 예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에 궁금증이 쏠려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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