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저편 <139>
오늘의 저편 <139>
  • 경남일보
  • 승인 2012.07.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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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 빈 집을 둘러보던 형식은 문틈에 끼어져 있는 쪽지를 보곤 곧바로 처갓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어딜 따라가겠다는 거야? 우리 장모님한테 걸리면 뼈도 못 추려.”

기어이 형식은 버럭 소릴 질렀다. 순희와 아내의 얼굴이 눈앞에서 돋아났다. 미안한 마음이 답답한 가슴에 얹혔다.

“집 앞까지만 따라갈게요.”

화심은 형식이가 달아나 버릴까봐 더욱 바짝 달라붙었다.

처갓집까지 텅 비어 있는 것을 본 형식은 구석구석까지 뒤졌다. 행선지를 알리는 쪽지를 찾기 위해서였다.

“내가 죽일 놈이야!”

아무 것도 찾지 못한 형식은 학동으로 다시 발길을 돌려 민숙의 친정집으로 향했다. 우물 속에 가라앉아버린 듯 조용한 마을에 화성댁이 남아 있을 리 없다는 생각은 들었다. 발길이 당겨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빨리 남쪽으로 피난을 가야죠. 서울이 그리 쉽게 무너졌는데 빨갱이들이 여기 화성에 오는 데 얼마나 걸리겠어요?”

서울에서도 어정거리다 개죽음을 당할 뻔했다. 화심은 숨을 죽이며 한강을 건너던 그 일을 생각만 해도 온몸에 소름이 오싹 돋는다고 떠들어댔다.

“아주머니, 왜 피난을 가시지 않으셨어요?”

집에 남아 있는 화성댁을 본 형식은 걱정이 앞서면서도 우선 반가운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마음의 무게중심은 이미 민숙이에 대한 염려로 완전히 기울어지고 있었다.

“순희 아범이야 말로 왜 이제 오는가?”

화성댁은 화심을 흘깃할깃하며 나무라듯 말했다.

“설마, 누나도 피난을 안 간 건 아니겠죠?”

민숙이가 학동에 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있던 형식이었다. 걱정이 후끈 달아오르는 마음으로 상대의 눈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무슨 소리야? 우리 민숙이 내외 피난간지가 언젠데??.”

화성댁은 그렇게 둘러댔다. 행복한 착각인지는 모르지만 민숙이가 학동에 남아 있다고 하면 절대로 피난을 갈 형식이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아. 예. 아주머니.”

형식은 비로소 안심하며 화성댁에게 같이 피난길에 오르자고 했다.

“다 늙어빠진 날 끌고 가겠냐? 죽이겠다고 아까운 총알 낭비하겠냐?”

화성댁은 형식의 등을 떠밀었다.

‘이년이야 죽든 말든 순희 아범 따라 가 버릴까?’ 형식이가 거의 강제로 팔목을 잡아 이끌자 눈물 나도록 고마운 그 인정에 화성댁은 이를 악물었다.

형식은 끝내 화성댁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남쪽으로 맥없는 발길을 옮겨가면서 그는 민숙의 집이 있는 뒷산자락으로 목을 몇 번이고 돌리곤 했다.

형식에게 손을 흔들며 서 있던 화성댁은 서글픔과 함께 외로움이 끓어오름을 느꼈다. 딸에 대한 가슴 아린 미움으로 전이되었다.

‘난리가 났는데 도대체 고등고시는 무슨? 흥, 흥, 흥.’

형식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을 때 화성댁은 팔을 앞뒤로 마구 흔들며 민숙이네로 달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뒷산에서 돌이 하나 굴러 떨어져도 폭탄인가 싶어 간이 덜컹할 판국에 피난을 가지 못할 사연은 없다고 결론을 내린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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