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보리밭의 추억
밀·보리밭의 추억
  • 경남일보
  • 승인 2012.07.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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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용범 (창원시의원)
초여름의 강렬한 태양 아래서 두 눈을 찡그리고 출렁이는 보리밭을 바라보았다.생의 막바지에 도달한 보리들은 황금빛 물결로 출렁인다. 지난달 함안에 다녀오는 길에 들판의 누렇게 익어 있는 보리를 바라보며 많은 생각에 잠겼다. 예전처럼 드넓은 들판에 만경창파로 펼쳐지는 보리밭은 아니었지만 오래전에 자취를 감추었던 들판에서 드문드문 모습을 드러내는 보리밭은 옛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갑기만 했다.

현재 일부 지방을 제외하고 보리밭이 우리에게서 사라진 것은 1970년말 무렵부터인 것 같다. 농가에서 보리재배를 기피한 것은 지난날 어려운 시절 식량증산을 위해 통일벼 재배로 식량이 모자라지 않게 된 연유도 있지만 보릿고개에 대한 사무치는 한이 “이제 우리는 보리밥을 먹지 않는다”는 일종의 양반의식으로 변한 데도 한 원인이 있을 것이다.

그 옛날 우리네 삶속에서 보리는 서민들의 강인함과 순수함으로 옛 추억 속에 남겨져 있고, 차디찬 겨울을 견디며 파랗게 자란 보리가 누렇게 익은 황금색으로 변할 때 농부들은 기쁨으로 가득찬 겨울을 견디며, 파랗게 자란 보리가 누렇게 익은 황금색으로 변할 때 농부들은 기쁨으로 가득 찬 풍요로움을 느꼈을 것이다.

나에게 아직 순수함에 대한 굶주림이 남아 있다면 그곳의 배경인 우리네 농촌의 보리밭이거나 밀밭이리라.

우리들의 어린 시절은 먹을 것도 그리 흔하지 않았거니와 시골에서 군것질할 만한 먹을거리도 없을 때 보리와 밀사리는 시골 아이들의 허기진 배를 채우는 최고의 먹을거리였다. 동네 골목대장격인 형님들의 명령만 떨어지면 우리들은 낫을 들고 전쟁터에서 전쟁을 하는 군인처럼 낮은 포복으로 보리·밀밭 고랑을 기어가서 가장 누렇게 잘 익은 보리나 밀을 한아름 베어 와 아무도 보이지 않는 산골짝으로 모여 마른 나뭇가지를 주워 모아 불을 지르고 설익은 밀과 보리를 불에 구워 입가에 시커멓게 묻혀가며 허기진 배를 채우곤 했다. 다 먹고 난 후 입가에 시커멓게 묻은 검둥이 얼굴을 서로 바라보며 죽어라고 웃어대던 밀·보리사리 추억을 그려본다.

그뿐 아니라 우리들의 어린 시절 껌을 구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다. 어쩌다가 지나가는 이웃 미군부대 군인들이 지나가면 영어도 생판 모르는 시골아이들이 “헤이, 헬로우, 셀레민트껌”이라 쫓아가며 외치면 미군들이 가끔씩 던져 주는 껌말고는 껌 구경하기조차 힘들었다.

그럴 때 우리들은 껌 대용으로 밀을 찿았다. 생 밀을 까서 오랫동안 씹으면 껌처럼 끈적끈적하게 된다. 이것을 풍선껌처럼 불어보지만 찰기가 많지 않아 이내 입술에 터져 엉거 붙고 만다. 그런 추억의 밀이나 보리밭이 요즘에는 생활의 보리밭으로 되살아나고 있다.

얼마 전 전북 고창에서 청보리 축제에 수십만 명이 몰려 보리피리 불기, 보리개떡 만들기 등 축제의 분위기를 만들고 보리체험 행사를 즐겼다. 보리밭이 도시인에게 인기를 끌자 영호남 여러 지방에서는 보리밭과 연계한 관광 프로그램을 다양하게 내놓고 관광과 농업을 결합한 경관(景觀)농업을 구상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그뿐만이 아니다. 웰빙시대의 붐을 타고 꽁보리밥 전문뷔페가 생기는가 하면 보리잎 농축액을 분말화한 화장품이나 보리우유도 시판되고 있다. 농약을 사용하지 않고 재배해 완전히 여물기 전에 수확하는 총체(總體)보리는 사료와 청정우유 원료로 쓰이는 친환경 작물로 각광을 받고 있기도 한다.

궁핍의 보리밭이 어느새 웰빙바람을 타고 고소득의 보리밭으로 변하듯 많은 것들이 빠르게 변하고 있다. 빠르게 변하는 세상 속에서도 아득히 먼 옛날 소멸한 옛 추억의 자리를 채우려고 바람이 누군가를 데리고 오는 소리가 들린다. 추억이 처음 시작된 곳에서 추억이 끝이 있는 곳으로 밀·보리밭은 우리 함께 영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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