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저편 <140>
오늘의 저편 <140>
  • 경남일보
  • 승인 2012.07.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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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댁은 딱 이렇게 정리했다.

‘고등고시는 핑계다.’

“이년아, 빨리 문 열어라. 이 어미 다 알고 왔다.”

동네가 텅 빈 판국에 신경을 쓸 남의 귀도 없었다. 화성댁은 숫제 선수를 치며 굳게 잠긴 대문을 주먹으로 두들겨 댔다.

“무슨 일이세요? 어머니.”

낮잠을 자다 놀란 민숙은 잠이 들 깬 눈을 비비며 대문을 열었다.

“잤냐? 우리 군이 한강다리를 끊어버렸다는구나.”

부석부석한 얼굴로 서 있는 딸을 보면서 화성댁의 마음은 금방 약해지고 말았다. 무심결에 형식에게 들은 이야기를 해 버렸다.

“누, 누가 그래요?”

민숙은 눈꺼풀을 번쩍 들어올렸다.

‘누가 학동에 온 것일까?’

마을사람들이 피난을 다 떠나고 없는 터여서 마음이 좀 편해지고 있던 차였다.

“순희 아비가 나룻배로 한강을 건넜다고 하더구나.”

“형식이 지금 우리 동네에 있어요?”

민숙은 가슴이 푸르르 떨려 옴을 느꼈다. 형식이가 남편에게 인사라도 하러 올까봐 오금이 저리는 것이었다.

“서울이 코앞인데 목숨 줄이 열 개가 아닌 다음에야 누가 마을에 남아 있겠니?”

화성댁은 딸에 대한 불만을 바로 터뜨렸다.

“피난 간 거 확실하죠?”

“허, 허, 그렇다니까. 꼬리가 백 개인 여우까지 달고 다니데.”

화성댁은 헛웃음을 허공에 뿌리며 몸을 돌렸다.

“그래요? 언제 철이 들려는지??.”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민숙은 또 대문을 꼭꼭 걸어 잠갔다.

대문빗장 거는 소리를 뒤로 하며 화성댁은 남편의 무덤으로 향했다. 잡초가 키 자랑을 하며 그녀 앞을 가로막았다. 별안간 남편의 혼령에 씐 사람처럼 눈을 멀겋게 뜨곤 죽으라고 무덤으로 가기만 했다.

‘여보, 민숙 아버지 제발 이녁 좀 데려가 주세요.’

비석도 없는 초라한 무덤 앞에서 고통에 신들린 화성댁은 넋을 놓고 앉아 있었다. 고통의 액즙인 눈물이 깡마른 볼 위에 줄을 긋고 있었다.

희멀겋던 7월 초순의 초저녁달이 노란색으로 바뀌자 학동엔 어둠이 깃들었다. 마루 끝에 앉아 앵앵거리는 모기와 싸우고 있던 화성댁은 몸을 벌떡 일으켰다.

‘매도 먼저 맞는 놈이 낮다고 했어.’

주먹을 불끈 쥐곤 뒷산자락으로 종종걸음을 쳤다. 동네에 사람이 없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무슨 일이 있어도 오늘밤에는 사위의 비밀을 알아내고야 말겠다고 다짐했다.

화성댁은 알고 있었다. 사위가 아직 학생이었을 때 왜놈 순사가 마을에 나타나기만 하면 뒷담을 넘어 몸을 피하곤 했다는 사실을.

‘어쩌다 내가 딸년 집 담벼락을 다 넘어야 하누?’

사위가 넘나들었던 그 장소를 빨리도 찾아낸 화성댁은 양팔을 머리 높이인 담장 위로 뻗었다. 팔오금으로 담벼락을 힘주어 끌어안으며 다리를 올리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화성댁은 그곳에서 제일 가까운 옆집으로 달려갔다. 빈집으로 들어가 지게하나 들고 나오는 건 앉아서 떡먹기보다 쉬웠다.

지겟가지를 담에 착 붙이고는 등태를 조심스레 밟고 담 위로 올라갔다. 양팔로 담장에 매달리듯 하며 몸을 집안으로 늘어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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