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저편 <141>
오늘의 저편 <141>
  • 경남일보
  • 승인 2012.07.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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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뒤채로 괭이걸음을 하던 화성댁은 흠칫 놀랐다.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발걸음을 소리 나는 곳으로 당겨갔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장모님 모시고 빨리 피난을 가.”

뒷방에서 나온 사위의 목소리였다.

“그럴 순 없어요.”

방문 앞 쪽마루에서 울린 딸년의 목소리였다.

“당신 출산할 때까지는 절대로 나쁜 생각 같은 건 안한다니까?”

“우리 같이 피난을 가요.”

“이런 몸으로 무슨 피난을 가니?”

사위는 문둥병자만 보면 사람들이 침을 뱉으면 돌을 던진다고 하더라는 말까지 덧붙였다.

‘뭐, 이런 몸? 허허허허 문둥병자??.’

딸 부부의 이야기를 엿듣고 있던 화성댁은 실성한 사람처럼 허허거렸다.

“모자 쓰고 긴팔 입으면 되잖아요?”

‘허허허, 얼굴에도?’

더 듣고 있을 수 없었던 화성댁은 대문 쪽으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자 잠깐, 누가 왔나봐.”

진석은 귀를 세우며 긴장했다.

그와 동시에 인기척을 느낀 민숙은 반사적으로 소리를 쫓아갔다.

“어머니이!”

화성댁의 뒷모습을 본 민숙은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네년 어미 귀 안 먹었다.”

너무 차분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화성댁은 야무지게 채워진 대문빗장을 벗겼다.

“어머니,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민숙은 너무 가여운 어머니를 잡지도 못하고 멍청히 서 있었다.

집까지 온 화성댁은 진이 다 빠져버린 얼굴로 마루에 털썩 걸터앉았다. 도대체 살아야 할 이유가 없었다. 아니, 젊으나 젊은 딸년의 앞날이 눈꼴시도록 보기 싫어 당장이라도 양잿물을 벌컥벌컥 들이마시고 싶은 심정이었다.

화성댁은 별들이 빛을 잃어가는 새벽하늘로 눈을 돌렸다. 빌어볼 데라곤 하늘 밖에 없는데 너무 높은 곳에 있었다.

온몸을 짓누르는 절망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그녀는 벌렁 드러누워 버렸다. 하늘이 가까이 다가왔다. 목 놓아 하늘을 불러대기 시작했다.

벌떡 일어났다. 도로 주저앉았다.

하늘에 신들린 화성댁은 마당 한가운데 드러누워 꺽꺽 느끼며 하늘을 불러대고 있었다.

그렇게 화성댁은 코앞에서 들려오는 총성에 놀란 민숙이가 달려올 때까지 하늘만 올려다보고 있었다.

한강다리가 끊어졌다고 서울에서만 진을 치고 있을 인민군에게 아니었다. 어설프게 폭파된 한강철교를 보수하여 남으로의 진격을 감행하고 있었다.

“어머니, 빨리 일어나세요. 숨어야 해요.”

민숙은 화성댁을 일으켜 세우려고 용을 썼다.

“같이 죽자.”

하늘에다 대고 위엄이 서린 목소리로 말했다.

“저도 당장 죽고 싶어요. 그렇지만 이 아기가 무슨 죄가 있어요?”

민숙은 답답한 앙가슴에다 주먹질을 해대며 덧붙였다. 아기만 낳고 나면 진석과 나란히 목매달기로 했다는 것을.

급기야 민숙은 꿈쩍도 하지 않는 화성댁 옆에 벌렁 드러누워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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