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과 신뢰지수
약속과 신뢰지수
  • 경남일보
  • 승인 2012.08.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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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형준 (진주동명고 교감)
약 460여 년 전 팔월 보름, 폭우 속 해인사 문 앞에서 삼가 선비 남명 조식은 충청도 보은에서 온 동주 성제원을 만났다. 일 년 전에 서울을 다녀오던 남명이 보은 현감 동주를 찾았고 작별하면서 “내년 팔월 보름에 가야산 해인사에서 만나자”고 약속한 것을 두 사람은 폭우 장마 속에서도 그 약속을 지켰다. 그 멀고 먼 길과 궂은 날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산사를 찾은 두 선비의 행동은 믿음이 박한 우리 현대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배우 박신양과 전도연이 주연한 ‘약속’은 조폭 두목과 여의사와의 사랑을 다룬 영화다. 둘만의 성당 결혼식에서 서로에 대한 애정을 고백하는 대사는 관객의 심금을 울렸고, 헤어질 때 여주인공 채희주가 “니 맘속에서 날 지우지 마. 약속해줘!”라는 대사도 그러하다. 멜로의 뻔한 줄거리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 것은 등장인물들에 대한 관객들의 신뢰도가 높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장면을 패러디한 TV드라마 ‘신사의 품격’에서 바람둥이 이정록의 대사는 그의 아내 박민숙은 물론 시청자들에게도 감동 대신 헛웃음을 줄 뿐이었다.

우리네 인간은 살아가면서 숱한 약속을 한다. 이 ‘약속’은 개인 간에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개인과 집단 간에 성립되기도 한다. 후자는 개인이 공인의 자격을 가질 때 성립되는데, 개인 간 약속도 중요하겠지만 공인의 약속은 보다 엄격한 검증을 받거나 도덕성을 갖는다. 이러한 약속의 전제는 믿음이고, 믿음은 곧 신뢰이기에 약속이행은 신뢰지수의 중요한 척도가 된다. ‘어떤 상황을 나타내려고 일정한 때를 100으로 하여 나타낸 수’를 지수(指數)라 하는데, 신뢰지수는 그 사람의 약속이행 정도, 즉 신뢰도를 수치화한 것이다. 수치가 높으면 타인들로부터 믿음의 정도가 클 것이고, 낮으면 정반대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이 한 약속을 다 지키며 살 수는 없다. 지키지 못할 뚜렷한 명분이 있거나 상황의 변화 속에서는 송나라 양공(襄公)같이 융통성 없는 어짊도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사람이 살아가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정도에서 벗어나는 행동이나 말을 할 수 있는데, 맹자는 이를 융통성, 즉 권도(權道)라 했다.

대선을 4개월 정도 앞둔 요즘, 대선 후보들의 공약과 언행에 대한 검증이 활발하다. 아무리 좋은 공약이라도 실현 가능성이 낮으면 공약(空約)이 될 가능성이 크고, 자신의 바뀐 언행을 순간마다 합리화하려 하면 믿음의 정도는 낮을 수밖에 없다. 특히 안개만 피우면서 출마를 저울질하는 사람, 자신에게 주어질 임기를 지키겠다고 핏대 올려 당선 된 뒤에 아전인수적 명분으로 그 약속을 헌신짝처럼 내팽개친 분들에 대한 신뢰도도 높을 수는 없을 것이다.

출세한 공직자나 성공한 CEO의 공통점 중 하나가 사소한 약속도 철저하게 지킨다는 것이다. 그런 반면 약속을 밥 먹듯이 어겨 약속시간마다 늦는 애인이 상대방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해도 그 고백의 신뢰도는 크게 높지 않을 것이기에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여름날에 나는 묻는다. 당신은 부모로서, 친구와 부부로서, 연인이나 한 조직의 구성원으로서의 신뢰지수는 얼마나 됩니까?

/문형준·진주동명고 교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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