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열(先烈)들의 절명시(絶命詩)
선열(先烈)들의 절명시(絶命詩)
  • 경남일보
  • 승인 2012.08.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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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위 (고려대학교 초빙교수)
영광과 오욕의 역사를 고스란히 안고 있는 8월이다. 이 역사를 떠받치고 있는 고귀한 영혼들이 있다. 선열들의 절명시를 되짚어 보고자 함이다. 이 시들이야말로 오랫동안 잊혀진 우리 영혼의 메아리라 여겨진다.

“조선왕조 마지막에 세상에 나왔더니/붉은 피 끓어 올라 가슴에 차는구나/19년 동안을 헤매다보니/머릿털 희어져 서릿발이 되었네/나라 잃고 흘린 눈물 마르지도 않았는데/어버이마저 가시니 슬픈 마음 더더욱 섧다/홀로 고향 산에 우뚝 서서/ 아무리 생각해도 묘책이 가이 없다./저 멀리 바닷길 보고파 했더니/7일 만에 햇살이 돋아오네/천길 만길 저 물속에 뛰어들며는/내 한몸 파묻기 꼭 알맞겠네”(我生五百末/赤血滿腔腸/中間十九歲/鬚髮老秋霜/國亡淚末己/親沒痛更張/獨立故山碧/百計無一方/欲觀萬里海/七日當復陽/白白千丈水/足吾一身藏)

1895년 을미사변(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일어나자 사재를 털어 경북 안동에서 의병을 일으킨 적이 있는 벽산(碧山) 김도현(金道鉉)이 자결하기 1년 전인 1913년에 쓴 절명시(絶命詩)다. 1910년 국권상실과 함께 순사(殉死)하려 하였으나 부친이 있어 뜻을 미루어 오다가 부친상을 다 치르고 나서야 비로소 1914년에 절명시에서 밝힌 대로 도해순국(蹈海殉國)을 결행하였다.

도해순국이란 무엇인가? 바다로 걸어 들어가 죽었다는 얘기다. 생각해 보자. 가족과 친지들이 통곡으로 전송하는 소리를 뒤로하고 유유히 바다 물속으로 한 발짝 한 발짝 걸어 들어가 마지막 손을 흔들며 죽었을 그 장엄한 모습을 말이다. 영덕군 영해면 대진리 앞바다에서다.

그는 죽기 1년 전에 이 시를 통해 스스로 그렇게 죽기로 결심하고 있었다. 가족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한 번에 죽지 못하는 질긴 목숨을 끊기 위해 세 번씩이나 아편을 먹고서야 목숨을 끊을 수 있었던 매천(梅泉) 황현(黃玹)과 어찌 그리도 한마음이었을까.

“오십 평생 죽기를 다짐했던 이 마음/국난을 당하여 어찌 살 마음을 먹으리/다시 군사를 일으켰지만 끝내 나라를 찾지 못하니/지하에도 남아 있을 칼날 같은 이 마음”(五十年來判死心/臨難豈有苟求心/盟師再出終難復/地下猶餘冒劍心) 이 시는 의병장으로 활동했던 이강년(李康秊)이 1908년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쓴 절명시다. 그는 의병을 일으키면서 이런 격문을 발표하였다. “~조약을 강제로 맺어 우리의 국권을 빼앗고~국모를 시해하고 임금을 욕뵈니 원수를 어찌 남겨두겠는가?”하고 말이다.

“다시 태어나기 힘든 이 세상/다행히 장부의 몸을 얻었건만/이룬 것 하나 없이 저 세상 가려하니/청산이 조롱하고 녹수가 비웃는구나”(難復生此世上/幸得爲男子身/無一事成功去/靑山嘲綠水嚬) “어머님 장례 마치지 못하고/임금의 원수도 갚지 못했네/나라의 땅도 찾지 못했으니/무슨 면목으로 저승에 가나”(母葬未成/君讐未復/國土未復/死何面目). 대한광복회를 조직해 그 사령관으로 무장투쟁을 벌였던 박상진(朴尙鎭)이 1921년 8월 대구감옥에서 사형당하는 날 아침에 쓴 시와 사형당하기 하루 전에 쓴 시다.

박상진은 1910년 판사시험에 합격해 평양법원 근무발령을 받았으나 그 즉시 사퇴하고 그 이듬해 만주로 건너가 석주 이상룡 및 일송 김동삼과 같은 애국지사들과 교류하다가 1915년에 대구에서 광복회를 조직했다. 국권회복을 위한 군자금을 모금하는 과정에서 이 사실을 밀고한 칠곡의 부호 장승원을 광복회 이름으로 처단한 사례는 유명한 일화로 남는다. 훗날 우리 정부가 친일인사 청산에 게을리하게 된 것도 어쩌면 그 부호의 아들이 대한민국 건국초기에 정부 요직에 있었던 데에도 그 원인이 있지 않았나 싶다.

“누에 오른 나그네 갈 길을 잊고/낙목이 가로놓인 단군의 터전을 한탄하노라/남아 27세에 이룬 것이 무엇인가/잠시 가을바람에 감회가 이는구나”(登樓遊自却行路/可歎檀墟落木橫/男子二七成何事/暫倚秋風感慨生). 신화적인 인물 신돌석(申乭石)이 남겨 놓은 시다. 얼마나 잘 싸웠으면 별명이 ‘태백산 호랑이’였을까.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터지자 18세의 나이로 의병을 일으켰다. 의병장 중에서 유일한 평민출신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908년 11월의 어느 날 그에게 붙은 현상금에 눈이 먼 친척의 손에 의해 살해됐다.

순국선열들이 토해 내는 단심의 애국충정이 새삼 눈물겹다.

김중위 (고려대학교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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