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으로 둘 것인가, 악연을 끊을 것인가
인연으로 둘 것인가, 악연을 끊을 것인가
  • 경남일보
  • 승인 2012.08.14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한우 (한국국제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

중학교 때인가, 고등학교 때인가 가물가물하지만 피천득의 ‘인연(因緣)’이란 수필을 배운 적이 있다. 피천득 그가 일본 도쿄에서 만난 아사코라는 소녀와의 수십 년에 걸쳐 세 번의 만남에 관한 내용이었던 것 같다. 만남이 거듭될수록 두 사람의 거리는 점점 멀어지고 마지막에는 “그리워하는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는 마지막 구절은 아려한 그리움과 아쉬움이 교차되는 글이었던 것 같다.

우리가 즐겨 쓰는 말 중에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말이 있다. 특히 불교에서는 사람이 한 번 만나려면 전생에 3000번의 인연이 있어야 한다고 하고 시간의 무량함을 나타내기 위하여 종종 겁(劫)이란 단어를 쓰기도 한다. 겁이라는 시간은 1000년에 한 번 떨어지는 빗방울이 집채만한 바위를 뚫는 시간이고, 백년에 한 번씩 내려오는 선녀가 이 지상에 내려왔을 때 그 옷깃에 스친 제주도만한 크기의 바위가 닳아 없어지는 시간이라고 한다. 그런 겁을 인연하여 지구의 한 나라에서 같이 태어날 만한 인연이 되려면 1000겁의 인연이 필요하고, 수없이 만나는 사람들 중에서 나와 같이 하루 정도 같은 일을 하려면 2000겁의 인연이 필요하다고 한다. 부부가 되려면 8000겁의 인연이, 형제로 만나려면 9000겁의 인연이, 부모로 만나거나 스승으로 만나려면 1만겁의 인연이 있어야 한다고 한다. 이러한 어마어마한 시간 속에서 형성된 사람과의 관계가 하나의 인연이라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소중한 사람들에 대해 의미 없이 대하거나 상처를 주어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살면서 사람으로 인해 상처를 입거나 혹은 입히거나 하여 서로의 마음을 다치면서 살아가는 일이 종종 있게 된다. 사람의 관계 속에서 상처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인간관계란 항상 좋을 수는 없기 때문에 그 관계에서 늘 배려하고 양보하여야 하는 힘겨움이 있기 마련이라는 것쯤은 나도 안다. 가끔씩은 인간관계를 잘하는 사람들을 보면 감탄을 금하지 않을 수 없고, 그들의 성숙된 마음에 놀라곤 한다. 하지만 나는 너무나 평범한 인간이고 아직도 미성숙된 인간인지라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을 그냥 무조건적으로 용서할 만큼 너그럽지는 못한 것 같다.

사람들은 인연이 깊으면 깊을수록 서로서로에게 기대하는 바가 크고, 그 기대에 미치지 못하였을 때 겪게 되는 아픔의 깊이는 더 넓고 깊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때론 서로서로를 해(害)하여 악연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지금 나를 해하는 사람은 전생에 내가 해를 끼친 사람이기 때문에 현생에서 그 업보를 갚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사랑과 자비로 용서해야 한다고 한다. 이해할 수 없는 말처럼 들리지만 한편으로는 또 이해가 되는 말이기도 한다. 인간관계에서 적을 만들지 말라고 했던 스승의 말처럼 결국 인간관계는 돌고 돌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인간관계에서 더 큰 악연을 끊기 위해서는 내가 포기하고 인연을 놔버려야 하는 용기가 필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놔버리지 않으면 내가 더 상처를 받게 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사람이 사람과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인가는 인간이 태어나서부터 배우게 되지만 어떻게 사람과 사람이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정답을 배우거나 방법을 구체적으로 배운 적은 없는 것 같다. 그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다양한 사람에 대한 적응력만 늘고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에서 손해 보지 않는 손익계산으로 사람을 만나는 것에 익숙해져 버리는 것 같다. 그래도 내겐 아직은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내 편이 되어주는 친구와 나보다 나를 더 아끼는 아버지와 가족이 있어 이 세상에 당당하게 맞서 싸울 힘이 바닥나지는 않는 것 같다. 어쩌면 인연이란 내가 스스로 맺어가는 인간관계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인간관계의 끈을 계속 이어가는 것이 인연이고, 내가 용기 내어 그 연을 끊어내면 악연 또한 끊기게 되는 것이 아닐까?

이한우 (한국국제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경상남도 진주시 남강로 1065 경남일보사
  • 대표전화 : 055-751-1000
  • 팩스 : 055-757-1722
  • 법인명 : (주)경남일보
  • 제호 :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 등록번호 : 경남 가 00004
  • 등록일 : 1989-11-17
  • 발행일 : 1989-11-17
  • 발행인 : 고영진
  • 편집인 : 강동현
  • 고충처리인 : 최창민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지원
  • 인터넷신문등록번호 : 경남, 아02576
  • 등록일자 : 2022년 12월13일
  • 발행·편집 : 고영진
  •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gnnews@gnnews.co.kr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