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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사람 가고 늙은 소나무만 세월을 버티는 곳(31) 묵와 고택의 여유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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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2.08.29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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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날의 대표적인 자연의 소리가 매미의 울음소리다. 짙푸른 숲속이 아니라도 좋고 외진 곳에 홀로 선 버드나무라고 좋고 마을 어귀의 당산나무라도 개의치 않으며 가시나무도, 소태나무도 상관없이 소음과 매연에 찌든 가로수라도 매미는 혼신의 소리를 낸다. 꾸밈도 바꿈도 변함도 없이 바람소리와도 섞고 산새소리와도 섞으며 찻소리 비행기소리와도 섞어가며 여름 한 철을 열심히 울어줘 즐겨 듣게 한다. 그런데 우리는 사오 년 만에 한번 듣는 소린데도 역겨워서 달갑잖게 들리는 소리가 있다. 4년마다 한 철씩 실없음을 알면서 들어야하는 소리들이 그렇고 5년마다는 간데족족 허망함을 알면서도 들어야 하는 소리가 그렇다. 염원의 끝을 쫓아 간절함을 일구려는 한결같은 진솔한 소리는 애당초에 없고 명리추구에 도취되어 자신도 모르는 남의 소리를 짜깁기해낸 소리만을 내기 때문이다. 임종의 순간에 유언 같은 영육을 우려낸 소리는 언제쯤이나 들을 수 있을지 요원한 바람을 차마 떨칠 수 없어 시공을 떠난 화양리 묵와고택을 찾아가서 마음의 여유라도 얻어 볼까하고 길을 나섰다.

88고속도로 해인사 IC를 나와서 합천, 고령 방면으로 좌회전을 하여 분기삼거리를 지나 묘산면 소재지 방면으로 26번 도로를 따라서 2km 남짓한 5분 안쪽거리를 가다보면 청정계곡 묘산천의 경치와 꼬부랑 산길로 이어지는 좌우로의 고산준봉이 좁은 골짜기의 운치를 더욱 맛나게 하는 길인데 풍광에 매료되면 지나치기 십상인 작은 갈림길이 있다. 합천읍에서 가려면 마령재를 넘어 묘삼면 소재지에서 해인사 방면으로 4km거리로서 묘산천을 앞세우고  겹겹으로 이어진 산이라서 마을이 있을 것 같은 예감조차 없는 곳인데 양편의 산자락이 굳게 입을 다물어버린 작은 틈새 길의 초입 삼거리에 화양 1km, 나곡 3.5km 라는 표지석을 앞세우고 황토색 문화유적의 안내판이 무심코 지나치려는 차를 급하게 세우게 한다.

지나치는 이들이 더러 있다는 것을 눈치 챈 안내판은 키를 늘어뜨리고 화양리 소나무, 묘산 묵와고가, 영사재, 야천신도비를 또박또박하게 알리며 당차게 막아선다. 산중에 숨겨지고 세월 속에 감춰진 선조의 얼을 찾아 화양리길로 접어들어 1km 남짓 들어가면 작은 주차장이 마련돼 있고 묵와고가를 알리는 표지판이 정중하게 나와 섰다. 화양동으로 잘 알려진 마을 안길은 정비가 잘 돼 있어 차는 묵와고가까지 수월하게 들어간다.

마을 초입에 들어서자 회관 앞으로 오석에 새겨진 난국회36현 비(蘭菊會 36賢 碑)와 애국지사 윤중수의 비가 폭염속의 차림새라도 옷매무새를 고치게 한다. 3.1독립만세 직후 파리강회회담에 2000만 민족의 4000년 역사를 짓뭉개려는 일제의 부당성을 직설하고 자주독립을 주장하는 호소와 결의를 한문체로 쓴 장문에 유림의 대표 137명이 목숨을 걸고 서명하여 보낸 구국의 결의서로서 청사에 빛나야 할 자랑스러운 조상의 얼이 우리의 기억 속에서 지워지는 줄도 모르고 사는 오늘이 부끄럽다.

죄스런 마음으로 예를 가름하고 작은 모롱이를 돌자 대궐 같은 기와집들이 저마다 용마루를 길게 늘어뜨리고 추녀마루는 창공을 걷어차듯 하늘 높이 치솟았다. 열려진 솟을대문 앞으로 네댓 단의 축으로 된 계단이 정갈한데 무궁화 꽃은 시드는 족족 피어나고 있고 그 아래로 꽤나 큰 육면체의 반듯한 바윗돌이 기이해서 한참을 보고 있었더니 인기척을 알고 나온 고택의 주인이 말을 타고 내리는 디딤돌이라고 일러준다.솟을대문을 들어서자 정면으로 마주하는 “묵와고가”가라는 편액이 걸린 사랑채는 웬 기역자 ‘「’ 형으로 고대광실 우뚝 섰다. 마주보는 누마루는 시원스럽게 높이 솟았는데 그 규모가 사방 두 칸에다 사랑방마루 반 칸과 붙어 있어 웅장하고, 팔작지붕의 육중한 추녀마루를 당당하게 떠받힌 우람한 기둥의 배열과 난간의 조화가 고풍스런 근엄함을 물씬 풍기고 있어 장엄하기까지 하다. 사방을 둘러보느라 발을 옮기지 못하는데 잊혀진 세월의 깊은 역사 속으로 빨려들게 한다. 대문간에 딸린 방 말고도 두 칸의 마구간은 비어있어 말안장에 높이 앉아 갓끈 휘날리고 도포자락 펄럭이며 역사속의 고갯마루를 넘고 넘으며 어디로 어디만큼 가고 있을까. 누마루에 좌정하고 국사를 염려하며 절의를 강론하던 옛사람은 간곳없고 250여년의 회화나무만 앞마당에 홀로섰다. 누마루에 앉아 보면 서편은 사랑방이고 동과 북의 판문을 열면 바깥 풍경이 문지방과 문설주를 테두리 삼은 각각의 풍경화를 액자에 건 듯하다.

 



안채로 들어가는 협문은 빗장이 달린 대문이 따로 있고 누마루를 내려서면 작은 중문이 있어 손님의 들고 남을 내정으로 알리는 통문이 허리를 굽혀야 들어 갈수 있게 좁고 작은데 식구들만의 출입문으로 사용하는 판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고색창연한 내당이 세월의 흔적은 감추지를 못했으나 할머니의 할머니로부터 대물림하여 이어져온 안방마님의 쓸고 닦은 정갈함이 경근함을 불러온다.

사당 앞에 우뚝 선 모과나무는 계유정란의 피바람을 피해서 벼슬도 팽개치고 한양천리 뒤로하고 이토록 외진 곳에 숨어든 설움이 마디마디 옹이 맺고 원통절통 가슴앓이 속은 썩어 비었는데 등줄마다 골이 파여 성한 곳이 없어도 올곧은 충절은 하늘의 뜻이 되어 옛 영화를 되찾아 600여년의 긴 세월에도 절의 지킨 교훈이 되어 푸른 잎을 무성하게 펼치며 옛 역사를 오늘에 잇고 섰다.

뜨락이 넓어 청소하는 데만 한나절이 걸린다는 파평윤씨 33세손 치환씨는 묵와고택의 내력을 일러주며 세월의 골이 깊게 파인 기둥을 쓰다듬으며, 되찾은 영화와 이어진 애국지사를 선조로 둔 후인임을 겸손으로 대신한다. 고가를 나서 영사재, 돈목재 육우당을 뒤로하고 나곡마을 소나무를 찾아 발길을 돌렸다.

불원지간의 둔덕에 신진사림과 왕도정치를 구현하려다 정유삼흉의 탄핵으로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가 후일 영의정에 추증된 야천 박소선생의 신도비가 한석봉의 글씨로 씌어져 얼룩진 역사 속에 한줄기의 빛이 되어 근엄하게 우뚝 섰고 영정을 모신 재실을 아래에 두고 조선 8명당의 한 곳이라는 화양동 솔숲에서 오늘의 정치사를 준엄하게 지켜보시는 앞에 답답한 심경을 시 한 수로 아뢰어 본다.

청초는 가뭄에 겨워 골골이 시드는데

집적대는 여우비만 갈증을 도두구나

강산을 흠뻑 적실 비는 어느 산에 걸리었나.

 비탈진 꼬부랑 산길을 오르면 네댓 집의 마을이 숲속에 띄엄띄엄 감춘 듯이 한적한데 그래도 한참을 더 오르면 끊어질듯 이어지는 모롱이를 돌고 돈 끄트머리에 또 하나의 작은 마을이 고산준령을 병풍삼아 둘러치고 여기저기 흩어져서 예닐곱 가구가 그린 듯이 조용한데 마을 아래 개울 옆으로 커다란 소나무가 눈길을 잡아끈다. 비탈진 개울가의 작은 논배미 옆으로 골을 가득 메운 가지는 용틀임 하듯이 하늘을 향해 부챗살처럼 사방으로 뻗혀있어 구룡송 이라도 하는데 가운데의 높은 줄기는 고사를 했어도 무성한 가지들은 사방을 그늘지우며 아래로 처졌다. 작은 안내판은 역사속의 내력과 함께 천연기념물 289호라고 일러 주건만 밑 둘레가 6.5m이고 가슴둘레가 5.5m라니 소나무의 굵기와 크기에 경탄이 앞선다. 수령 400년으로 추정된다지만 인목대비의 친정아버지인 김제남이 영창대군을 왕으로 옹립하련다는 역모로 몰려 삼족이 화를 입게 되자 그 6촌은 화를 피하여 이곳 화양동으로 숨어들어 이 소나무 아래에 초가를 짓고 살았다니 세수 500은 족히 될 만한 전국 최대의 소나무다. 가슴 가득 안아보려 했더니 되레 구룡송에 안기어져 역사의 품속에서 간절히 빌었다. 핏빛으로 물들어 온 애달픈 역사는 이제는 과거사 속으로 영원히 잠들게 하시고 길이길이 국태민안을 영유케 하옵시고 만고상청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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