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저편 <175>
오늘의 저편 <175>
  • 경남일보
  • 승인 2012.09.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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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 중간쯤 내려가던 화성댁은 한사코 팔로 어둠을 휘젓기만 했다. 몸을 의지할만한 아무 것도 잡히지 앉자 발을 조심스레 앞으로 내밀었다.

 ‘어, 어, 저, 절벽??? 대체 여기가 어디란 말이던가?’

 발밑에도 디딜만한 것이 느껴지지 않자 화성댁은 얼른 발을 거둬들였다. 진저리를 치던 그녀는 뒷산과 남산 사이에도 절벽 같은 건 없었다고 생각하며 발을 조심스레 다시 내밀었다.

 ‘으으아악!’

 그 순간 화성댁은 깊이를 알 수 없는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지며 끔찍한 비명소릴 냈다.

 ‘휴우, 늙으면 죽어야지. 할 짓이 없어서 자다가 개꿈을 다 꾸냐?’

 스스로를 탓하다 말고 화성댁은 뭔가 생각난 얼굴로 벌떡 일어났다. 마당까지 한걸음에 달려 나온 그녀는 하늘로 눈을 돌렸다.

 도토리처럼 생긴 달이 남쪽 하늘에 떠 있었다. 사립문으로 눈을 돌렸다간 마루 끝에 궁둥이를 붙였다. 냉기가 온몸으로 타고 올라왔다. 조급증이 난 사람처럼 몸을 도로 일으켰다.

 “추운데 왜 나와 계세요?”

 민숙은 댓돌 아래로 내려서는 화성댁을 보며 다가갔다.

 “너야말로 이 밤에 무슨 일이니?”

 화성댁은 흠칫 놀라기까지 했다.

 “중공군이 밀고 내려온대요.” “다 이긴 전쟁이라고 빨치산인지 그런 것들만 조심하면 된다고 하지 않았냐?”

 화성댁은 집에 가서 잠이나 자라고 했다.

 “서울을 또 빼앗기면 어떡해요?”

 민숙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라. 용진이가 어떤 손자인데 안사돈이 그런 손자를 끼고 서울에서 넋을 놓고 있겠냐? 되놈들이 오기 전에 피난 나올 것이다.”

 화성댁은 딸의 등을 사립문 밖으로 밀어냈다.

 “그렇겠죠? 서둘러 피난을 나오겠죠?”

 민숙은 떠밀려가면서 혼잣말로 확신했다.

 “그래, 아무 걱정 말고 김 서방이나 잘 지켜라.”

 화성댁은 정자나무 쪽으로 종종걸음을 치기 시작했다.

 “어머니이!”

 저만치로 멀어져 가던 민숙이가 별안간 몸을 돌렸다.

 “아휴 깜짝이야 이 어미 귀 먹었냐?”

 “이 밤에 어디 가세요?”

 “뒷간에 간다, 뒷간에??.”

 화성댁은 그렇게 말해 버렸다.

 “예엣? 왜 그쪽으로 가세요?”

 민숙은 이마가 후끈 달아올랐다. 방금 전부터 느낀 것이었지만 어머니가 무엇엔가 홀린 것 같았다.

 “헛, 내가 지금 어디로 가는 거야? 늙으면 죽어야지.”

 화성댁은 외손자보고 싶은 마음에 낮부터 줄곧 정자나무 쪽으로 목을 빼고 있었다고 중얼거리며 가던 길을 되돌아왔다.

 민숙은 그 마음을 알겠다는 듯 목을 끄덕였다.

 딸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기를 기다리고 있던 화성댁은 다시 사립문 밖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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