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초입에서
가을의 초입에서
  • 경남일보
  • 승인 2012.09.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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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숙향 (시인, 악양초등학교 교사)

기승을 부리던 더위가 어느새 자취를 감추고 아침저녁으로 싸늘한 기온이 살갗에 파고들어 잠시 잊고 살았던 가을을 떠올리게 한다. 여름 이불과 묵은 여름의 흔적을 걷어내고 생활의 환경을 바꾸며 가을날에 주로 들춰보던 오래전의 일기장을 열어 보았다. 읽다 보니 잊었던 이야기들과 십년도 넘은 마음의 기록들까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시간여행을 하게 되었다.

십여년 전에 문인들 사이에서 글제로 자주 등장하여 화제가 되었던 ‘미리 쓰는 유서’가 눈에 띈다. 그 글제로 시와 수필을 쓰기 위해 여럿 동호인들과 전남 보성 대원사의 티벳박물관에 만들어져 있는 ‘죽음 체험방’을 찾아가서 관에 누워서 죽음의 기분을 맛보고 밤새 고민하며 유서를 적어 보던 기억이 새롭다. 낡은 일기장 속에서 잊혀졌던 사람들과 박제된 기억들이 하나둘 되살아나는데 그땐 지금보다도 더욱 삶에 진지한 자세로 임했던 흔적이 역력해 보인다. 문득 바쁘고 거친 삶에 묻어나는 스트레스 속에 갇혀 있는 현재의 못난 자신을 발견하고는 새삼 놀란다.

스트레스는 해결해 나가야 하는 일의 양과 어려움에서 오는 것보다 주로 사리사욕과 아름답지 못한 마음들 속에서 오는 것 같다. 무수한 이야기들이 펼쳐지는 세상과 집단 속에서 마음을 정화시키고 한결같이 고요하게 삶을 꾸려간다는 건 속인들에겐 쉽지 않은 일 같다. 지난날 혼돈과 방황 속에 백두산 천지가 사람들 마음의 심연인 양 수차례 찾으며 헤맸던 흔적이 일기장에서 튀어 나와 온종일 머릿속에 맴돌아 되뇌어본다. 마음여행은 영원히 지속되어야 할 삶의 숙제 같다.

간절히 보고 싶었다

십수 년 속내 한번 비춘 적 없던 심연

울울창창 침묵을 가둬 놓은

천지를 찾아

천치 천치라고 내뱉으며

무슨 꽃 이름이 그래?

호범꼬리 산매발톱 호노루발 개박쥐나물

삼잎방망이는 또 뭐야

구름국화라든지


별꽃은 어디로 다 숨어버린 거야

더 이상 질곡의 삶 받아들일 수가 없어

그믐달의 포효에도 가녀린 모가지를 꺾지 않는

바람꽃을 닮고 싶었어

보여줄 듯 보여줄 듯

짙은 운무 아래 몸 숨기는 그 심연(深淵)

온전히 다 보여주고 싶은 게 사랑일까

옆 얼굴만 보고도 연민할 수밖에 없는 게

사랑일까

하산길

백두산 마타리 떼 지어 흔들리며

노랗게 노랗게 웃는다

/최숙향·시인·악양초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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