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저편 <179>
오늘의 저편 <179>
  • 경남일보
  • 승인 2012.09.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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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냐, 구해 주다 말다. 구해주고 말고.”

 자신 있게 말한 화성댁은 여하간 빨리 약을 구하기 위해 딸네 집에서 나왔다. 다음 순간 나아갈 방향이 생각나지 않았다. 기운이 일시에 다 빠져버린 얼굴로 맥없는 발길을 집으로 돌렸다.

 ‘내가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마루 끝에 앉아 만삭의 새댁이 있을만한 집을 머리로 더듬고 있던 화성댁은 벌떡 일어났다. 아무리 머릿속을 더듬어도 떠오르는 가까운 마을에는 배불뚝이가 없는 것 같았다. 길 건너 마을로 가서 수소문해볼 작정이었다.

 중공군이지 되놈들인지가 다 된 밥에 재를 뿌리고 있어서일까. 길에는 또다시 남으로 향하는 피난민들의 행렬로 가득 찼다.

 건넌 마을도 많은 집들이 비어 있었다. 피난길에 오르지 못한 늙은이가 사립문 소리에 반색하며 목을 문으로 돌리고는 할 뿐이었다.

 화성댁은 정자의 친정집 동네로 발길을 돌렸다.

 “아이구, 화성댁 아니세요?” 

 하필이면 말이 많기로 유명한 나팔댁이 반갑다는 얼굴로 오고 있었다. 머리에 피난보따리를 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제 고향으로 돌아오는 모양이었다.

 “아, 안녕하세요? 다들 또 피난보따리는 싸고 있는데??.”

 화성댁은 눈앞이 아찔해 옴을 느끼며 떨떠름한 얼굴로 말꼬리를 흐렸다.

 ‘남 싸움에 칼을 빼는 년이 돌아왔으니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겠군.’

 소리 없이 투덜거렸다.

 “왜 아니겠어요? 작정하고 고향에 찾아들었는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니, 참 우리 동넨 어떤가요?”

 “어떻다뇨? 뭐가요?”

 화성댁은 뜨악한 얼굴로 상대를 보았다.

 “빨치산인지 빨갱이인지 하는 못된 놈들이 마을로 안 내려오냐구요?”

 나팔댁은 뒷산과 마을 양옆의 산들을 번갈아 힐끔거리며 진저리를 쳤다.

 “헛, 그놈들이 안 오는 데가 어디 있겠어요? 갑자기 나타나선 총을 들이대는 바람에 죽다가 살아났어요.” 

 화성댁은 인민군을 돌로 쳤던 일을 되생각하면 입술을 부르르 떨었다.

 “이사를 갑시다. 산이 가까운 데선 살지 않는 것이 좋아요.”

 나팔댁은 서울로 가든지 수원시내로 가든지 아무튼 이사를 할 것이라고 떠벌리기부터 했다.

 “이사를 할 수 있으면 해야죠.”

 화성댁은 속이 조금은 뚫리는 기분으로 맞장구를 쳤다.

 “무슨 말씀이세요? 화성댁도 어서 이사 갈 준비를 하셔야죠? 여기 있다간 큰일을 당해요. 큰일을 당한다니까요?” 

 나팔댁은 당장이라도 화성댁의 팔을 잡아끌 기세로 떠들었다.

 “민숙이 년이 영 비실비실해서 당장 이사하기는 ??.”

 화성댁은 말끝을 맺지도 않고 목을 옆으로 돌려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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