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은 체육계에도 새 빛을 발하다
광복은 체육계에도 새 빛을 발하다
  • 경남일보
  • 승인 2012.09.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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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정기가 서술하는 진주체육사 <2>변혁기 진주체육계 변신
▲진주시 평안동에 위치한 1946년에 진주시 축구협회 사무실로 사용된 구 삼포회관이 있던 자리. 현재는 상가가 들어서 있다. 오태인기자

 

8·15 광복과 더불어 우리나라의 체육은 군국주의적 제한된 체육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일제시대의 체련 과목에서 보건체육으로의 변신을 꾀했다. 각급 학교에서는 필수과목으로 선정되었고 대학에서도 필수 교양과목으로 채택되어 튼튼하고 올바른 심신의 발달로 건강한 사회인의 육성에 힘쓰는 한편 체육과나 체육대학 등이 새로이 설립되었다.

또 체육은 체조, 스포츠, 유희 등을 종합하여 조화적·민주적인 인간상을 추구하는 새로운 내용으로 편성되기에 이르렀다.

이와 같은 학교 체육의 새로운 변천과 더불어 사회 체육면에서도 1945년 9월 대한체육회의 역사적 부활과 함께 종목별 체육단체의 탄생을 보게 됨으로써 획기적이고 새로운 조직으로서의 체육시대가 출범됐다.

1958년 8월 1일 공포된 학교 보건과 및 체육과의 목적에 운동과 위생체육의 내용으로 둔 점, 그 목표에 신체 및 정신의 건전한 발달, 사회적 성격의 육성 등에 관한 이해를 강조하고 학생들의 성장·발육 발달의 특질을 명백히 하여 지도에 합리성을 갖게 한 점과 지도사 유의점에 학교 신체검사와 기타 측정결과를 참작하여 그 결함을 제거하는 데 노력하도록 해 실증적 체육교육의 운영을 꾀하도록 한 것은 올바른 체육의 과학화를 목표로 한 것이었다.

1960년대에 들어와 정부 당국은 학생들의 심신양면에 걸쳐 건전한 발육을 위하는 한편 각급 학교 입시전형에도 체능시험을 포함시켜 학교 체육을 강화하였다.

당시 우리나라 체육의 변혁은 ‘86 아시안게임’과 ‘88 올림픽대회’를 개최함으로써 우리나라의 국제적 지위를 반석 위에 올려 놓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으며, 한국 국민의 투철하고 강인한 정신을 전 세계에 선양하는 바탕이 됐다.

 

◇진주체육계의 변화

진주체육계는 8·15 광복을 맞이하여 진주축구협회가 중심이 되어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1946년 진주축구협회는 적산 가옥인 구 삼포회관(三浦會館·전 금성초교 건너편)을 인수하고 그곳에 사무실을 차렸다. 그리고 회장에 김용진, 부회장에 김용하, 전무에 조학우씨가 각각 맡아 협회를 운영했으며, 송명철, 권창세, 우정환, 서봉조, 오제웅, 정동조씨 등은 이와는 별도로 진주청년축구회를 결성했다.

1944년 일제하에서 개최하기로 했다가 열지 못했던 영남 3지구(부산, 마산, 진주) 축구대회를 개최해 조국 광복의 환희를 축구를 통해 만끽했다. 그후 대구팀까지 참가해 영남 4도시 축구대회가 연례적으로 순회 개최됐다. 각 도시의 대표선수들이 출전한 이 대회는 축구 발전은 물론 4개 도시 축구인들의 우의를 돈독히 하는 큰 역할을 했으며 50여년간 지속됐다.

1957년 진주체육회가 발족되기 전까지는 각급 학교 체육활동이 주축을 이뤄 각종 대회가 열렸으며, 신문사 지사·지국이 주최하는 체육행사도 있었다. 국제신문 지사장이던 강천석씨는 진주중학교 운동장에서 육상기록대회, 축구대회, 사이클대회 등을 열기도 했다. 당시에는 공설운동장이 없어 모든 체육행사가 진주중학교 운동장에서 펼쳐졌던 것이다.

당시 진주농고의 배구는 전국에 그 이름을 떨쳤다. 부산 동래고, 서울 중동고와 전국대회에서 우승을 놓고 겨룰 정도였다. 진주농고에는 강대철(37회), 김용운, 안남수, 서봉수, 박종한씨 등이 주전 멤버였으며, 이들은 사천 공군부대와 친선 배구대회를 가져 그 우승기념으로 생전 처음 공군 비행기를 타고 진주 상공을 거쳐 지리산을 둘러보고 오는 행운을 가지기도 했다.

축구종목을 보면 축구팀은 진주고, 진주농고, 진주사범 등 3개교에서 운영됐다. 6·25 직전 광주에서 개최된 전국체육대회에는 진주농고가 경남도 대표로 출전하기도 했다. 당시에는 별도의 코치가 없었고 교사나 선배가 직접 지도를 맡아 선수를 가르쳤다. 당시 진주농고에는 구연재 교사가 축구를 가르치고 주장은 이명길 선수가 맡았었다.

육상종목의 경우는 진주사범 운동장에서 경남육상대회가 열리기도 했다. 당시에는 전문적인 육상선수가 없어 타 종목의 선수가 육상선수로 많이 출전했었다. 진주여고의 김연실 선수는 100m 아시아 기록을 수립했었고, 이홍순 선수는 투포환 대표선수로, 진주고 이용수(26회)선수는 100m를 11초 기록을 세워 당시 국가대표였던 엄팔용 선수에 버금가는 우수선수였다. 또한 김진기 선수는 높이뛰기, 이명길·최학희·구완서 선수 등도 100m에서 좋은 기록을 내기도 했다. 그리고 1957년 남강 백사장에서 학생 모형비행기 날리기대회가 열리기도 했다.

 그리고 진주는 남강이 시내를 가로질러 흐르는 자연적 조건으로 강 양안이 백사장이 형성돼 있어 예로부터 씨름이 유명했다. 씨름은 우리나라 고유의 민속경기로 두 사람이 샅바를 맞붙잡고 일정한 규칙 아래 힘과 재주를 겨루어 상대방의 발바닥 이외의 부분을 먼저 땅에 닿게 넘어뜨리면 이기는 경기이다. 민속 유희로 단오절, 중추절에 거행되던 씨름이 현대식 운동경기로 발돋움한 것은 1927년 전후의 일. 일제 당시 일본에서 체육교육을 받고 와 당시 고등보통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강낙원, 서상천, 한진희, 강진희씨 등이 씨름을 현대식 운동경기종목으로서의 기틀을 만들었다.

진주 남강 백사장에는 늘 씨름판이 벌어졌는데 천하장사로 이름을 날렸던 조삼제씨, 218회나 우승을 차지했던 양유식 장사, 뛰어난 기술을 자랑하던 오재영씨, 금산 외팅이(별명), 박해영씨, 최연수씨, 양건식씨, 이찬석씨, 강두만씨, 김학성씨, 이성군씨, 양태석씨, 정삼태씨, 이수영씨 등이 전국에 이름을 날린 우리 고장 진주의 씨름 선수들이었다.

그리고 진주 씨름 육성 발전을 위해 경전여객의 박종실 사장이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이후의 진주 씨름은 진주 남중, 진주상고(현 정보고), 경상대로 이어지는 전성기를 맞이하는 계기가 됐다.

또한 진주 탁구도 도내는 물론 전국적으로 그 명성을 날렸다. 6·25를 전후해 남자선수로는 김일, 천영석(전 국가대표 감독), 정연웅, 임규호, 허건, 박정용, 주재한, 안효균씨가 유명했으며, 여자선수로는 박정자, 강말순 선수가 우수한 기량을 자랑했다.

농구는 김창수, 손병섭, 방규택, 홍종국씨 등이 주축이 되어 이끌어 갔으며, 태권도는 1955년경 서울에서 이철상 사범이 내려와 YMCA 회관을 빌려 체계적으로 보급하기 시작해 김태영씨가 전수받아 서정영 선수 등을 배출하기도 했다.

유도는 황영규·황성규 형제가 많은 후진을 양성했으며 씨름을 했던 강두만 선수가 제18회 도쿄 올림픽대회에 레슬링 종목에 국가대표 선수로 출전하기도 했다.

그리고 진주 아마추어 복싱은 정봉문씨가 일찍 보급해 자제들인 정현상·정국현씨의 기량이 뛰어났으며 박명윤·박옥윤 형제도 잘했다. 특히 동생 박옥윤씨는 도 대표로 광주 전국체전에 출전하기도 했다.

-고(故) 권창세·김태석·이명길·최학희씨 증언

/전 진주 문화방송 편성국장, 진주체육회 부회장, 경남·진주축구협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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