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합강정과 반구정
반구정. |
세상의 시끄러운 소리는 들리지 아니하고 이슬비 내리는 꿈속에 한가히 갈매기만 날더라는 반구정의 주련 글귀가 생각나서, 남해고속도로 함안 요금소를 나와 대산면 장암리를 찾아, 함안들 끝자락의 처녀뱃사공의 시비를 지나 작은 고개를 넘었다. 올망졸망한 작은 마을들이 가을 들녘으로 옴쏙 내려앉은 듯이 평화롭고, 질펀하게 깔린 볏논에는 고개 숙인 벼들이 가을 햇살을 한가득 받으며 여물어 가고 태풍 볼라벤과 덴빈이 남긴 겉살의 상처는 흔적 없이 아물어 고요함만이 바람결에 넘실댄다. 한번 갔던 길이건만 서촌삼거리에서 좌회전을 하여 곧장 가다가 구룡정사거리에서 직진을 하고부터 처음처럼 헤맨다.
시골길은 길 찾기가 예사롭지 않은데 오가는 사람조차 뜸하여 느긋함을 터득하지 않으면 풍광과도 멀어지고 풍류와도 작별이다. 잘못 든 길에서는 돌아설 때를 익히고, 둘러가는 길에서는 어리석음을 깨닫고, 지름길에서는 오만함을 돌아보며, 갈림길에서는 신중함을 배워야 한다. 구룡정사거리에서 직진하여 4~500m에서 표지판은 없어도 좌회전을 하여 장암리보건진료소를 찾으면 왼편 길로 곧장 가서 장포마을을 지나면 강둑이 막아선다. 남강이 낙동강과 합류하는 곳의 강둑이다. 여기서부터 강둑길이 아닌 좁다란 임도를 따라 쉬엄쉬엄 오르면 낙동강이 벼랑아래에서 멈춘 듯 소리 없이 흐르고 강 건너 멀리 창녕 땅 낙동강 둔치와 들녘이 그림같이 펼쳐진다.
임도에서 이어진 출입구는 합강정 당우 상봉정 옆으로 들어가 마당으로 이어지고 솟을대문인 낙원문은 낙동강으로 내려서는 출입문인 것으로 보아 창건당시부터 배산인 용화산의 임도가 개설되기 전까지는 창녕군 남지에서 나룻배를 타고 들고났음을 짐작케 한다.
칠월칠석 무렵 달이 뜨면 달빛의 꼬리가 낙동강에 길게 드리워져 월주의 장관을 볼 수 있다니 후일을 기약하고 반구정을 찾아 발길을 돌렸다. 저 멀리 남지철교가 그림같이 아련한 산길을 걸어 이내 닿은 옴쏙한 산기슭 아래로, 우람한 느티나무 한 그루가 기와지붕을 가지자락으로 그늘을 지워주며 당당한 자태로 낙동강을 굽어보고 섰다.
용화산의 발치기를 감돌아 흐르는 낙동강을 풀어내며 펑퍼짐한 기슭에 자리잡은 정면 4칸의 크지 않은 기와집이 근작의 관리동을 옆에 끼고 나직하게 앉았다.
반구정은 두암 조방선생이 정유재란을 끝맺고 칼을 씻고 활을 풀어 세상사의 자질구레한 소리를 멀리하며 여생을 보내려고 낙동강 웃개나루에 세웠던 정자다. 두암 선생은 형 조탄과 함께 1592년 곽재우장군과 창의하여 의병을 일으켜 정암나루와 기강나루에서 크게 전공을 세웠고 멀리 금오산성까지 나아가 승전하고 화왕산성을 끝내 지켜내신 의병장이다. 반구정은 이후 강섶이 침식하고 당우가 퇴락하여 1866년 근접한 옛 청송사 자리로 옮겨왔고 문장가 성재 허전이 기문을 지었다.
반구정 편액이 정각에 비해 커서 무겁게 달린 듯 하고 네 기둥의 주련은 옛 사람의 심사를 말없이 일러준다. 수령 650년의 느티나무 아래에 근작의 육모정 정자는 근엄하게 서 있다. 두암선생의 후손이신 성도 옹께서 짓고, 호연지기를 줄여 ‘호기정’이라고 편액을 손수 써서 붙였다고 한다. 정자에 앉아 절경의 운치에 젖어 있자니 온갖 세상사가 덧없음이 느껴진다.
/지역문제연구소장
저작권자 ©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