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시일반 성금 모아 공설운동장 건립
십시일반 성금 모아 공설운동장 건립
  • 경남일보
  • 승인 2012.09.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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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정기가 서술하는 진주체육사 <3>진주체육 도약기(상)

▲시민성금 등으로 건립된 공설운동장
광복 이후부터 5·16(1961년)까지 변혁기를 겪은 진주체육은 5·16 이후에 도약기를 맞는다. 1957년 진주시체육회가 민간단체로 결성되고 회장에 권창세, 부회장에 김갑진·김사옥, 전무에 김태석, 사무국장에 리명길씨가 맡는 등 진주체육은 점차 틀을 잡아갔다. 당시 전국체전 출전 때는 경상남도교육청 학무과에서 모든 실무를 맡아보았으며 5·16 전까지 해마다 진주시민대운동회가 진주중학교 운동장에서 열렸다. 이때 희망자는 누구라도 나와 경기를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조도영씨가 사무국장을 맡았을 당시 진주시체육회 사무실을 김남흥씨 소유의 파리양화점 2층(현 우리은행 옆)으로 옮기고 전화도 가설하는 등 체육회 사무실로서의 모습도 갖췄다.

 1961년 5·16이 터지면서 우리나라 체육에 큰 변화가 왔다. 이에 따라 진주체육도 변화됐다. 체육단체의 장을 지방행정기관의 장이 당연직으로 맡게 된다. 서슬퍼런 군부 시절에 진주(권창세 회장)와 밀양(박남규 회장)은 바로 내놓지 않고 버티다가 1년 후에야 자리를 내놓았다고 한다.

 5·16 이후 도내 타 시군 체육회장은 당연직으로 해당 시장·군수가 맡았으나, 진주는 민선회장인 권창세씨가 맡아오다 1962년 도체육회 실무부회장으로 선임되면서 당시 이병문 진주시장이 진주시 체육회장을 맡게 된 것이다.

그리고 경남체육회에서는 도 단위 협회를 각 시에 배정하게 됐는데 진주에는 권창세 실무부회장이 주선하여 축구, 씨름, 아마복싱, 궁도협회 등이 오게 됐다.

진주체육인들은 중안동에 있던 한전 변전소 부지 100여평(전 진주의료원 정문 앞)을 체육회 사무실로 사용하기 위해 불하신청을 냈으나 여의치 못했다. 변전소 부지가 한전 기술주임에게 불하되자 전점용 소장이 양해를 구해 절반은 중안동 사무실로 절반은 권투회관으로 이용하기로 하고 매매대금은 진주시가 부담했다.

1962년 당시 시체육회 산하단체로는 축구(김용하), 농구(김남흥), 사이클(여상기), 탁구(남중천), 배구(김종식), 야구(전점용), 정구(당시 진주지법원장), 씨름협회(박종복) 등이 있었다 1963년 배드민턴협회(리명길), 핸드볼협회(조재업)가 조직되고 1964년 테니스협회가 구성됐다.

1964년 당시 국회의원 구태회씨가 진주공설운동장 건립을 약속했다. 그런데 공사가 제대로 추진이 되지 않는 등 체육인들의 비난 소리가 높아지기도 했다. 그러던 중 1967년에 공설운동장 건립이 본격화된다. 체육인들은 김종구 진주시장과의 협의 후 진주공설운동장 건립을 위한 사단법인 진주체육진흥회를 발족시켰다. 그리고 이사장 김윤양, 회장 권창세, 상무이사에 강용성씨가 각각 선임됐다. 그런데 공설운동장 건립 비용 확보가 가장 큰 문제였다. 진주체육진흥회는 내무부에 기부금 신청을 냈으나 기각돼 강용성씨가 직접 상경, 끈질긴 설득 끝에 승인을 받았으며, 시내 극장 입장료에 3원씩을 첨가해 시민성금을 모금하는 한편 그리고 진주시의 예산 지원도 받아 당시 진주교도소 농장부지(현 공설운동장)를 매입했다. 흥농건설(사장 이봉조)이 1년간 공사 끝에 1968년 5월 국제 C형의 진주 공설운동장이 준공됐다.

진주체육의 산파 역할을 했던 권창세씨는 1915년 11월 14일 진주에서 태어나 보통학교 5학년 때 집 근처 진주제일공립보통학교 운동장에서 축구를 처음 접했다. 그는 당시 어른들이 찬 공이 푸른 창공을 오르는 것을 보고 호기심이  발동하여 고무공을 구입했고, 이때 부터 어른들을 흉내 내기 시작한 것이 축구 인생의 시발점이라고 한다. 그의 축구에 대한 남다른 관심과 기량은 21세 때 전국체전에 참가한 경남대표선수를 이끌기도 했다. 19세 때부터 진주대표로 운동장을 밟았는데 그때 함께 뛴 진주출신 선수로는 김용하, 김창구, 이강열, 우동구, 정정현, 최인수, 신기순, 정기주, 조학우 등이 있었다.

권창세씨는 가장 기억 남는 축구 시합으로 일제 때 밀양에서 펼친 원정경기를 들었다. 당시 밀양은 전국축구대회 열기가 한창이었는데 이때 진주에서 밀양으로 이사한 의사 서병문씨의 스폰서를 받은 주최측이 진주팀을 초청했다. 그러나 결승에서 맞붙은 밀양팀과 진주팀은 좀처럼 승부가 나지 않았다. 일몰로 인해 당일 시합이 중단되고 다음날 다시 양팀은 재시합을 벌였다. 이 때 전반에는 1점 차이로 진주가 뒤진채 끝났다. 그러나 후반들어 4대 1로  진주가 주도권을 쥐자 경기는 극도로 험악해지고 결국 관중이 곤봉으로  진주 선수를 난타하는 불상사가 발생하는 등 경기장이 아수라장으로 변했다고 한다. 결국 경기 시간 14분을 남긴 채 진주의 우승을 인정했고, 경찰의 삼엄한 호위를 받으며 진주로 돌아왔다. 후일 권창세씨는 이 경기를 축구시합으로써 사선(死線)을 넘긴 생에 가장 추억 깊은 일이라 했다. 그는 한 때 조선화물자동차주식회사(KTC·대한통운 전신·역전파출소 옆) 진주지점에 입사해 회사 내  축구부를 창설, 지역 축구인구 확대에 기여하기도 했다.

당시 진주축구의 산실인 KTC축구부에는 우정환, 안종수(마산 KTC소속)선수 등이 활약하며 직장축구로 이어져 왔다. 그러던 중 당시 사장의 요청을 받아 권창세씨가 합류되고, 진주선수로 활약이 뛰어났던 송명철, 서봉조, 김태석, 정정현씨가 보강되면서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했다고 한다.

이 시기는 진주축구가 전국대회에서 각종 우승을 일궈내는 등 진주축구 명성이 전국에 알려졌다. 1965년 조선일보사가 주최한 전국중고축구선수권대회에서 창단 3년만에 진주농고 축구팀이 우승을 차지했다. 지방팀 우승은 24년만이었다. 당시 우승 주역은 감독에는 최학희, 코치에 남기택, 선수로는 고봉우, 노흥섭, 이태부, 김한기, 김형두, 정연태, 김시용, 임장수, 정건주, 조재덕, 이영근 선수 등이었다. 진주고에도 노종천, 한영희, 서대근 등 기량이 뛰어난 선수들이 많았다. 그래서 진주에서 펼쳐지는 예선전 또한 본선 못지않게 흥미를 더했으며, 양교 선배·재학생간의 열띤 응원전도 가열 현상을 빚기도 했다. 1950년 팀을 창단한 봉래초등학교도 그동안 도내는 물론 전국 각종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당시의 전력은 1981년 전국시도대항 축구대회, 84년 전국맹호기 축구대회, 87년 한국전력사장기 유소년축구대회 등 전국대회에서 우승하는 밑거름이 됐으며, 지금도 초등부 전국 정상을 지키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제3공화국은 체육을 통해 국민적 통합을 이끌어내기 위한 체육정책제도를 확립하는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정부는 ‘체력은 국력’이라는 구호 아래 국민체위 향상과 국민통합의 원동력이자 국가발전의 기본으로 인식해 엘리트체육 육성에 총력을 기울였다. 이런 배경 속에서 ‘국민체육진흥법’의 제정과 국민체육진흥재단의 설립 등의 법적·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었고 강력한 공권력을 바탕으로 한 체육정책을 펼치면서 국민체육시대로의 진입을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

이에 따라 진주체육도 국민체육시대에 접어들었다. 김용하씨에 이어 권창세씨가 1974년 진주축구협회장을 맡게 된다. 부회장에는 리영달·김시용, 전무이사에 허정기, 기술이사에 김원섭씨가 임명됐다. 그리고 시내에 산재해 있던 조기회 축구팀을 협회에 등록하도록 하여 체계적인 축구 보급에 노력했다. 또한 권창세씨는 자신의 회갑 비용으로 순금 컵을 기증해 조기회 축구대회를 연례행사로 치루도록 했다. 당시 조기회는 비봉, 대지, 화성, 일신, 사오, 거상 등이 있었으며 진주상공회의소가 주최한 상공인 축구대회, 경남일보가 주최한 직장대항 축구대회가 열려 젊은 축구인들이 각 직장에 취업하는데 큰 기여를 하기도 했으며 지금 까지 해마다 대회가 열리고 있다.

진주시에서는 4월 1일 시민의 날 동 대항 체육대회를 개최하여 전 시민이 공설운동장에서 열띤 경기와 응원전으로 하루를 즐겁게 보내기도 했으며 진주시 문화상을 지역사회부문, 체육부문, 공로부문으로 나누어 시상하기도 했다..

/전 진주문화방송 편성국장, 진주시 체육회 부회장

경남·진주축구협회 부회장

 

진주축구 산실 역할을 했던 조선화물자동차 주식회사(KTC·대한통운 전신) 옛 부지. 지금은 기아자동차와 삼성의료기가 들어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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